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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박사 기자의 스포츠용어 산책 1781] 당구대 천을 왜 ‘라사’ ‘라사지’라 부를까

2026-05-11 07:32

올해 프로당구 큐스쿨 경기가 열린 일산 PBA스타디움[PBA 제공]
올해 프로당구 큐스쿨 경기가 열린 일산 PBA스타디움[PBA 제공]
“라사 갈았어?” “라사지 상태 좋네.”

당구를 오래 친 사람들 사이에서는 당구대 천을 두고 흔히 이런 표현을 쓴다. 처음 듣는 사람은 외국어 같기도 하고, 전문 용어 같기도 하다. 하지만 당구를 치는 이들은 이것이 당구대 천을 의미한다는 것을 안다. (본 코너 1780회 ‘왜 ‘당구대’를 ‘다이’라고 부를까‘ 참조)

한자어 ‘라사(羅紗)’는 원래 고급 모직물을 뜻하는 오래된 말이다. 한때 양복점을 가리키던 말로 쓰였다. 1950 ~ 1960년대에는 ‘xx라사’ 간판이 많았다. 당구장에서 쓰는 천 역시 모직 계열 직물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라사천’, ‘라사지’라는 표현으로 굳어졌다.

라사는 한자로 ‘새그물 나(羅)‘와 ’깁 사(紗)‘의 합성어이다. 이 말은 조선시대부터 쓰이던 단어로 인터넷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하면 국역 10회, 원문 4회 등 총 14회나 검색된다. 촘촘하게 짠 고급 모직물, 비단을 뜻했다. 예전에는 양복감이나 군복, 외투 재료 같은 두꺼운 직물을 통틀어 라사라고 부르기도 했다.

라사는 원래 포르투갈어 모직물 원단종류인 ‘raxa’를 일본에서 취음해 표기한 말이다. 일본에서 모직물을 ‘라샤(ラシャ)’라고 불렀는데, 이 표현이 한국으로 들어오며 라사로 자리 잡았다는 설이 유력하다. 오늘날 당구장에서 말하는 라사는 특정 브랜드명이 아니라, 원래는 직물의 종류를 가리키는 말에 가깝다.

초창기 당구대 천은 양모(wool) 기반 직물이 주로 사용됐다. 공이 지나갈 때 지나친 마찰은 줄이면서도 일정한 속도를 유지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구대 천에는 일반 천과 다른 조건이 요구됐다. 표면이 균일하고, 마찰이 일정하며, 내구성이 좋아야 했다. 또 공의 회전을 안정적으로 받아줘야 했다. 이 조건에 가장 잘 맞았던 재질이 바로 고밀도 모직물이었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당구대에 깔린 천 자체를 라사라고 부르게 됐다.


흥미로운 건 당구인들이 라사보다 라사지라는 표현을 더 많이 쓴다는 점이다. 이는 일본식 표현 습관의 흔적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과거 한국 당구 문화는 일본식 용어 영향을 크게 받았다. ‘히네리(회전)’, ‘오시(밀어치기)’, ‘다마’ 같은 말들이 대표적이다. (본 코너 1779회 ‘왜 아직도 '당구공'을 ‘다마’라고 부를까‘ 참조)

라사지 역시 일본식 표현이 변형되며 굳어진 생활 용어로 보는 해석이 많다. 여기서 ‘지(地)’는 바탕이나 천 재질을 뜻한다. 결국 라사지는 직역하면 ‘라사로 된 천’ 정도의 의미가 된다.

현대 당구대 천은 울(양모)과 나일론, 합성섬유를 혼합한 제품이 많다. 내구성과 속도를 동시에 잡기 위해서다. 국제대회용 고급 천 역시 혼방 소재가 일반적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라사라고 부른다. 재질이 바뀌어도 이름은 남은 셈이다. 마치 복사기를 '제록스'라 부르거나, 물티슈를 브랜드명처럼 사용하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당구는 한국에 들어오며 일본식 표현과 서양 스포츠 문화가 뒤섞여 독특한 언어 문화를 만들었다. 라사지라는 단어도 단순한 은어가 아니다. 오래된 직물 용어, 일본식 표현, 당구 산업의 역사까지 겹쳐 만들어진 생활 언어다.

[김학수 마니아타임즈 기자 / kimbundang@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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