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손자병법] 20 이상군의 노마지지(老馬之智)

이신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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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0-04-21 0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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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손자병법] 20 이상군의 노마지지(老馬之智)

-늙은 말의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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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회초 2사 1루에 2-1의 살얼음판 리드. 1회 선발로 올라와 116개의 공을 던진 정민철은 한계에 도달한 듯 했다. 투수를 당연히 바꾸어야 할 시점이었다. 과연 누구로 바꿀 것인가. 역시 가장 믿을 수 있는 마무리는 ‘왼팔 구대성’이었다. 하지만 한화 이희수 감독은 다시 한 번 더 생각했다.

10월 26일 대전구장. 한화와 롯데의 1999년 한국시리즈 4차전. 한화가 2승1패로 시리즈 전적에서 앞서고 있었고 경기에서도 2-1로 리드하고 있었다. 4타자만 더 잡으면 3승1패가 되면서 확실하게 유리해 지지만 역전이라도 당하면 2승2패로 다시 원점이 되고 마는 상황. 감독입장에선 장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감독의 노심초사와는 달리 운동장의 분위기는 구대성을 기정사실로 보고 있었다. 구대성은 이미 7회쯤부터 불펜에서 몸을 풀고 있었다. 누가 봐도 구대성만큼 확실한 투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희수 감독의 입에선 다른 이름이 튀어 나왔다.
“이상군”.

의외의 카드였다. 한때 팀의 원투펀치로 에이스 역할을 했지만 그건 10여 년 전의 일이었고 지금의 이상군은 겨우 선수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38세의 노장이었다. 공 1개에 시리즈의 향방이 걸린 절체절명의 순간에 내놓을 수 있는 패는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이상군은 마치 그럴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던 듯 여유있게 마운드로 향했다. 그리고 아무 거리낌 없이 타자를 향해 공을 뿌렸다. 롯데 타석에는 페넌트레이스 리딩 히터 마해영이 서 있었다.

“구대성이 옳은 판단일 수 있었죠. 그러나 3차전 2-2 동점 상황에서 구대성을 마운드에 올렸다가 연장전에서 진 것이 떠올랐습니다. 그 날 밤 한숨도 못 잤습니다. 여유를 가지고 마운드를 운영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죠”

구대성은 3차전까지 마무리로 매 게임 마운드에 올랐다. 3차전 연장 10회 초 공필성, 박현승에게 연속 2루타를 맞고 패전의 멍에를 졌지만 3게임 1패 2세이브로 여전히 믿을 수 있는 확실한 카드였다.

이희수 감독이 구대성의 등판 타임을 한 박자 늦춘 것은 구대성을 못 믿어서가 아니었다. 위기에서 맞서 싸우지 않고 피해 갈 수 있는 백전노장 이상군의 노련함을 더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이상군은 빠르지 않은 공을 던졌다. 그것도 마해영이 좋아함직한 공이었다. 눈앞에까지 치기 좋은 공이 들어오자 마해영의 방망이가 빠르게 돌았다. 홈런도 가능한 뱃팅볼 수준. 하지만 그 공은 끝이 약간 도는 변화구였다. 마해영이 아차 했지만 방망이는 이미 돌고 있었다.

“완력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죠. 마해영이 방망이에 잔뜩 힘을 넣고 노리고 있는데 정면으로 부딪치면 내가 깨질 수 밖에 없죠. 원하는 공을 던지는 척 하며 유인했더니..”

성급하게 나간 마해영의 방망이는 휘어진 후의 공을 건드리고 말았다. 빗맞은 공은 유격수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유격수 앞 땅볼, 추격에 쐐기를 박은 한 수 였다.

이희수 감독은 9회 비로소 구대성을 올려 4차전을 끝내 1점차로 잡았다. 그리고 5차전 역시 한 타임 쉬어가는 이상군-구대성의 8, 9회 이어던지기로 승리, 그토록 원했던 팀의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엮어냈다.

젊은 말은 빠르지만 늙은 말은 지름길을 안다.

[이신재 마니아리포트 기자/news@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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