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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스포츠 100년](74)광복과 함께 국제대회에서 빛난 코리아(상)서윤복의 보스턴 마라톤 제패

2021-07-02 13:51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인 1947년 4월 19일 미국 보스턴에서 열린 제51회 보스턴마라톤대회에서 서윤복이 우승을 차지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서윤복의 가슴에 새겨진 KOREA와 태극기가 유난하게 선명하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인 1947년 4월 19일 미국 보스턴에서 열린 제51회 보스턴마라톤대회에서 서윤복이 우승을 차지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서윤복의 가슴에 새겨진 KOREA와 태극기가 유난하게 선명하다.
서울축구단의 미 군용기타고 상하이 원정…3승1무1패로 경기마쳐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무조건적인 항복으로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 신생 독립국이 되었지만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까지는 3년의 시간이 걸렸다. 이 동안은 미 군정 체제였다.

그렇지만 우리 체육인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태극기를 앞세우고 처음 출전한 국제종합대회는 1948년의 생모리츠동계올림픽과 제14회 런던올림픽이었지만 이보다 1년 앞선 1947년에 처음으로 태극기를 앞세우고 국제무대에 첫 발을 디뎠다,

바로 이해 4월 축구팀이 상하이 원정에 나선 것이다. 축구팀의 상하이 원정은 당시 상하이 한국 교민회 회장이던 신국권의 주선으로 성사됐다. 신국권은 중국에서 오래 거주했고 중국 대표선수로 올림픽 육상 경기에 출전하기도 했던 인물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중국에 남아있던 우리 교민들의 입장은 미묘했다. 전쟁에 이긴 중국인들이 우리 교민들을 친일파로 대하기도 했고 ‘왜 자기 나라로 돌아가지 않느냐.’며 경멸의 시선을 보내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크고 작은 충돌이 끊이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다.


신국권은 양 국민의 화목을 위해서는 두 나라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는 축구를 통해 친선을 도모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하고 상하이 축구협회의 초청장을 들고 서울로 왔다. 이에 조선축구협회는 21명의 상하이 원정선수단을 구성했다. 다음은 선수단 명단이다.

△단장=신국권 △감독=이영선 △코치=김용식 △선수=박규정 차순종 홍덕영 박대종 민병익 민병대 이용일 주영광 최성권 김규환 정국진 정남식 오경환 우정환 안종수 임창식 위혜덕 박건섭

선수단의 면모는 사실상 국가대표팀이나 다름없었지만 상하이 원정경기는 국가대항전이 아니기 때문에 국가대표팀 대신 ‘서울 축구단’이라는 이름을 썼다. 문제는 선수단 수송이었다. 배를 이용하는 방법을 찾아봤지만 정기항로가 개설되어있는 것도 아니어서 쉽지 않았다.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미군 군용기에 자리를 얻었다.


미 군정청이 제공한 수송기 편으로 4월 11일 상하이에 도착한 서울축구단은 5차례 경기를 가졌다. 1차전 상대는 백계러시아인들로 구성된 소련구락부였다. 2만 명 수용 규모의 일원(逸園)경기장에는 태극기가 게양됐고 상하이 임시정부 수장으로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김구가 설립한 인성학원 학생 40여명이 공개행사에서 애국가를 불렀다.

1차전에서 3-1로 이긴 서울축구단은 상하이철로팀과의 2차전에서는 0-2로 뜻밖의 패배를 당했다. 심기일전한 서울축구단은 3차전에서 상하이 최강팀인 청백(靑白)팀을 1-0, 4차전에서는 동화(東華)팀을 4-0으로 물리쳤다. 동화팀과의 경기 때는 독립정부 수립을 위해 장제스 총통을 만나러 중국에 왔던 이승만 박사가 경기장을 찾아 선수들을 격려했다.

원정 경기는 당초 4차전으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중국 측 요청으로 홍콩의 성도(星島)팀과 한 경기를 더 치렀다. 강팀이라고 여겼던 청백과 동화팀이 연달아 패배하자 자존심이 상한 중국이 세미프로팀인 성도팀을 불러온 것이다.

성도팀과의 경기가 열린 날 일원경기장은 초만원을 이루었다. 선수단이 입장할 통로까지 막히는 바람에 버스를 경기장 벽에 바짝 붙여 건물 유리창을 열고 간신히 들어갈 수 있었다. 운동장에까지 관중이 내려오는 통에 경기를 진행하기 어려워지자 대회본부는 전반전 30분, 후반전 30분만으로 서둘러 경기를 끝냈다. 이 5차전은 0-0으로 비겨 서울축구단은 3승1무1패를 기록하고 4월 30일 환영을 받으며 귀국했다.

서울시청 광장에서 열린 서윤복의 환영행사 모습
서울시청 광장에서 열린 서윤복의 환영행사 모습
서윤복의 보스턴마라톤 제패
마라톤 선수단도 서울축구단과 비슷한 시기에 첫 해외원정에 나섰다. 조선육상경기연맹이 1947년 3월 미 군정청을 통해 제51회 보스턴마라톤대회에 출전신청을 했는데 대회본부가 초청장을 보내온 것이다. 선수단은 감독 손기정, 코치 겸 선수 남승룡, 선수 서윤복으로 결정됐다.

문제는 원정 경비였다. 발을 동동 구르는 선수단이 보기 딱했던지 미 군정청 직원들이 모금에 앞장서고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여기저기서 후원금을 보내와 간신히 경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4월 3일 미군 수송기편으로 김포공항을 떠난 선수단은 도쿄 괌 하와이를 거쳐 샌프란시스코로 갔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한 교포의 호의로 미국 국내선을 갈아타고 서울을 떠난 지 닷새 만에 보스턴에 도착했다.

선수단 가운데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터라 모두 가슴에 행선지와 여행 목적을 적은 카드를 달고 있었다. 보스턴에서 열리는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는 조선 선수들이라는 내용이었다. 마중 나온 교포 백남용의 안내로 공항을 빠져나온 선수단은 백남용의 집에 여장을 풀고 컨디션 조절에 들어갔다.

1897년 첫 대회가 열린 보스턴마라톤은 올림픽 마라톤 다음으로 긴 역사를 자랑한다. 해마다 미국의 애국기념일(원래는 4월 19일이나 1969년부터는 4월 세 번째 월요일)에 열리는 보스턴마라톤은 뉴욕, 런던, 베를린, 시카고마라톤과 함께 세계 5대 마라톤으로 꼽힌다.

제51회 보스턴마라톤대회는 8개국에서 156명의 선수가 참가한 가운데 4월 19일 정오 시작됐다. 당초 우승후보는 당시 세계기록을 갖고 있던 핀란드의 피터넨, 전년 대회 우승자인 그리스의 카이라, 세 차례나 보스턴마라톤을 석권한 캐나다의 코티. 서윤복과 남승룡에게 눈길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손기정 감독이 세운 전략은 이랬다. 서윤복은 레이스 전반에는 선두그룹의 움직임을 살피면서 따라붙을 만큼의 거리를 두고 달리다가 마지막 8km를 남기고 앞선 선수들을 따라잡아 우승을 노리고 남승룡은 서른다섯 살로 나이가 많으니 서윤복의 페이스메이커로 뛰다가 컨디션에 따라 상위 입상을 노린다는 것이었다.

후미그룹에 섞여 출발한 서윤복은 20km 지점에서 선두그룹을 따라잡은 뒤 피터넨에 바짝 붙어 달리다가 28km 지점의 ‘상심의 언덕’에서 선두로 나섰다. 위기도 있었다. 레이스 도중 갑자기 개 한 마리가 짖으며 달려드는 통에 넘어진 것이다. 겨우 몸을 일으켜 피터넨을 따라 잡았지만 이번에는 운동화 신발 끈이 풀려 버렸다. 끈을 다시 매느라 시간을 보냈다가는 피터넨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다급한 서윤복은 길가에서 응원하던 관중에게서 물 잔을 받아 신발 끈에 부었다. 다행히 끈은 더 풀리지 않았다.

골인점을 8km 가량 앞둔 언덕에서 서윤복은 드디어 피터넨을 추월한다. 그리고 그대로 내달려 결승선에 뛰어 들었다. 서윤복의 기록은 2시간25분39초. 당시로선 최고기록이었다. 남승룡은 12위로 골인했다. 그러나 10년 후 코스를 다시 측정한 결과 길이가 1km 남짓 짧다는 것이 밝혀져 그 이전의 기록은 공인받지 못하게 된다. 그 중에는 아쉽게도 서윤복의 기록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서윤복의 보스턴마라톤 제패는 광복 후 국제대회에서 거둔 첫 우승이다. 초대 상공부 장관으로 당시 유엔에서 외교활동을 하던 임영신은 “서윤복이 외교관 100명 보다 더 큰일을 해냈다.”고 극찬했다.

서윤복의 우승은 IOC 가입에도 일조를 했다고 볼 수 있다. 뉴욕에서 열린 미국육상경기연맹 주최 파티 석상에서 브런디지 미국올림픽위원장으로부터 격려와 함께 “코리아가 내년 런던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다짐을 들은 것이다.

선수단은 2개월여를 미국에서 체류하다 배편으로 귀국길에 올랐다. 선수단의 귀국 보따리에는 임영신의 도움으로 마련한 빨랫비누, 그릇, 라이터돌 등이 가득했다. 일본 요코하마를 거쳐 인천에 개선한 날이 6월 22일. 미국 화물선 제너럴 와이글 호에서 내린 선수단은 인천항을 메운 수많은 인파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손기정의 자서전은 당시의 모습을 이렇게 전한다.
‘6월 22일 인천 입항처럼 자랑스럽고 떳떳한 개선은 일찍이 없었다. 서윤복 군은 보스턴에서 받은 승리의 월계관을 머리에 쓰고, 나와 남승룡 선배는 단기로 가져갔던 커다란 태극기를 펴 흔들었다. 인천 제일 부둣가에는 수만 명의 환영 인파가 몰렸고 인천 시내 가가호호에 개선을 축하하는 태극기의 물결이 춤을 추었다. 우리는 부두에서 딸 문영이 다니던 덕성유치원생들로부터 축하의 꽃다발을 받고, 그 길로 시가를 행진, 인천중학 교정의 시민환영대회에 참석했다.’

보스턴 마라톤에 출전한 세 선수의 환영회를 알리는 포스터. 주최 남조선과도정부, 후원 조선체육회와 조선육상경기연맹으로 되어 있어 이채롭다.
보스턴 마라톤에 출전한 세 선수의 환영회를 알리는 포스터. 주최 남조선과도정부, 후원 조선체육회와 조선육상경기연맹으로 되어 있어 이채롭다.
마라톤의 노래도 나와
선수단은 이튿날 서울까지 카퍼레이드를 한 뒤 중앙청 앞에 마련된 환영식에 참석했다. 환영식장에서는 조선체육회 여운형 회장과 임정 측의 김규식, 미군 주둔군 사령관 하지 중장, 조선육상경기연맹 정환범 회장 등이 이들을 반겼다.

마이크를 잡은 서윤복은 세계 제패의 기쁨을 이렇게 표현했다.

‘참으로 감개무량하다. 40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삼천만 민족을 대표하여 국제무대로 출발하는 그 때는 죄수가 사형대로 올라가는 무거운 기분으로 떠나 승지(勝地) 보스턴에 도착하여 원기회복에 애써 대회 당일은 씩씩하게 싸웠던 것이다. 앞으로 더욱더욱 연습으로 싸워 내년에는 런던에서 열리는 올림픽에서도 반드시 그 영광을 우리가 찾아올 것을 맹세하는 바이다. 여러 말 하고 싶은 말이 많으나 너무나 가슴이 복바쳐 이만 줄이겠으나 끝으로 삼천만 여러분께서 이렇게 성대히 환영하여 준데 대하여 심심한 감사의 뜻을 표하는 바이다.’

마라톤 열기도 고조돼 대회가 줄을 이었다. 6월 7일에는 조선학생육상경기연맹 주최로 서윤복 세계제패기념 전국전문대학대항 육상경기대회가 열렸고 8월에는 조선마라톤보급회와 체육신문사가 공동주최하는 마라톤대회가 출범했다.

환영행사도 이어졌다. 7월 28일에는 조선체육회 조선육상경기연맹 서울시체육진흥회 주최로 서울운동장에서 ‘세계제패 마라톤 선수 환영회’가 열렸고 부산 대구 광주 대전 전주 청주 목포 순천 춘천 개성에서도 돌아가며 환영회가 개최됐다. 김구는 당시 머물고 있던 경교장으로 인사를 온 서윤복에게 족패천하(足覇天下)라는 휘호를 건네며 우승을 축하했다. 발로 세계를 제패했다는 뜻이다.

그 뿐이 아니었다. 보스턴마라톤 제패기념 음반이 나오는가 하면 서윤복의 훈련과정과 보스턴마라톤 대회 모습을 담은 ‘승자의 수도’라는 영화도 상영됐다. 시인 이병기는 ‘마라톤 환영가’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1. 예부터 내려오며 우리 세계는 언제나 경쟁하는 마당 아닌가 / 빛나는 역사 깊은 조선의 겨레 겨루고 나가면 누가 당하랴
(후렴)날뛰어라 날뛰어라 우리 용사야/ 승리로다 승리로다 우리 용사야.

2. 캄캄한 그 날에도 우리 용사는 크나 큰 혜성처럼 빛을 내었다./ 먼동은 다 트이고 길을 밝은데/ 남보다 앞선 걸음 어이 멈추랴

3. 청춘의 피가 끓는 조선의 아들 조국을 사랑하는 조선의 오누/ 자랑과 보람 있게 개선하는 날 선열의 영혼인들 아니 반기리

그만큼 서윤복의 마라톤 제패는 어려운 시기를 살아가던 모두에게 희망과 활기의 아이콘이었다. 조선 최초의 요릿집인 명월관 남녀 종업원 60여명은 1만2500원을 모아 선수단 환영비용으로 써달라며 기탁했다. 그러자 각계에서 마라톤 후원금이 답지했다. 제2의 서윤복을 꿈꾸며 청소년들이 저마다 거리를 내달린 것도 이즈음이다. 다음은 설인식이 노랫말을 쓴 마라톤 제패가다.

1. 이 나라 아들의 줄기찬 얼과 함, 세계를 흔들어 날리는 태극기
(후렴) 북을 울려라 빛나는 승리, 드높은 이 나라 마라톤 나라.

2. 오색의 타오른 우리의 그 횃불, 온 누리 빛내리 다시금 밝으리

3. 한 줄기 핏줄에 빼어난 봉우리, 영겁에 피리라 월계의 꽃송이

언론도 앞 다투어 서윤복의 세계제패를 대서특필했다.

동아일보는 ‘세계 제패의 영광, 또 우리 젊은이에! 장하다! 민족의 꽃-당당 서윤복 제패’의 제목 아래 ‘봄 마자 싹트는 무궁화 이 강산에 세계적 감격의 순간! 우리 조선의 젊은 아들이 미국 보스턴마라톤에 당당 우승하여 마라톤 왕국의 조국 영예를 온 천하에 떨치어 황금 탑의 한 층은 더 오르게 되었다. 고려대학의 스물네 살 된 서윤복 군의 태극기 가슴이 결승선의 테이프를 끊을 찰나에 메인마스트에 태극기는 오르고 서 선수의 머리 위에는 승리의 월계관이 씌워졌다.’고 보도했다.

1947년 4월 22일자 조선일보
1947년 4월 22일자 조선일보
또 조선일보는 ‘찬연! 우리 민족의 우수성-서 선수 당당 일착. 보스턴마라톤 조선군 제패’의 제하에 ‘무서운 전쟁이 끝난 뒤 평화를 구가하여 세계의 젊은이가 억센 힘과 정신을 자랑하는 미국 보스턴운동협회 주최 제51회 세계마라톤대회는 20일 오전 6시 반 미국 보스턴 시 26마일 385야드 코스에서 열려 멀리 태평양을 건너 이에 초청을 받아 참가한 조선 대표 손기정 남승룡 서윤복 세 선수 중의 서 선수는 세계의 강호 170명을 물리치고 가슴의 태극마크를 빛내면서 2시간 25분 39초라는 초인적인 세계신기록을 만들어 우승하여 조선민족의 위대한 힘을 전 세계에 떨치었다.’라고 썼다.

[정태화 마니아타임즈 기자/cth082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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