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넷 조선왕조실록에서 ‘棋王’을 검색하면 나오지 않는데, 이는 이 말이 일본의 영향으로 개화기 이후 우리나라로 유입될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 언론에서 기왕전이라는 말을 본격적으로 사용한 것은 1970년대 이후이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 따르면 조선일보 1973년 12월26일자 1면 사고에서 ‘새해 갑인년(甲寅年)을 맞아 2백만 애기가(愛棋家)의열땅에 부용하기 위해「청룡배(青龍杯)쟁탈 기왕전(棋王戰)」을 새로 마련합니다’라고 알렸다. 이 사고가 관심을 끄는 것은 기왕전(棋王戰)이라는 명칭의 의미가 단순한 번역어가 아니라 당시 한국 바둑계가 추구한 상징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기사를 보면 ‘명실공히 한국 기계의 패자가 되는 대전의 우승자에게는 기왕의 칭호를 수여한다’고 기왕전 창설 취지를 강조했다. 여기서 핵심은 기왕(棋王)이 바둑의 왕, 한국 바둑계의 패자(覇者)라는 정의이다.
당시 한국 바둑계에는 이미 국수전, 최고위전 등이 있었지만, 조선일보가 창설한 기왕전은 아예 ‘최고의 타이틀전’을 표방했다. 기사 속 표현을 빌리면 ‘한국 기계 최고의 타이틀전’, ‘명실공히 한국 기계의 패자’, ‘기왕의 칭호 수여’라는 세 문장이 사실상 기왕전 명칭의 어원을 설명하고 있다.
바둑 대회의 이름에는 그 시대가 바라는 이상이 담긴다. 국수전, 명인전, 천원전, 왕위전. 저마다 다른 이름을 내걸고 최고의 기사를 가려왔다. (본 코너 1802회 ‘왜 바둑에서는 '명인(名人)'이라 말할까’, 1805회 ‘바둑에서 왜 '국수(國手)'라고 말할까’ 참조)
바둑은 원래 승부의 세계이면서도 겸양의 미덕을 중시하는 문화다. 그래서 기사들은 스스로를 낮추고, 실력은 대국으로 증명한다. 그런 세계에서 '왕'이라는 표현은 다소 파격적이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기왕전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왕은 단순히 한 번의 승자를 의미하지 않는다. 가장 강한 자, 가장 높은 곳에 오른 자, 그리고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실력의 소유자를 뜻한다. 기왕전이라는 이름에는 현재 바둑계 최강자를 가려내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다.
흥미로운 것은 바둑에서 왕이 되는 길이 결코 권력의 길이 아니라는 점이다. 현실의 왕은 혈통이나 제도로 탄생할 수 있지만, 바둑의 왕은 오직 승부를 통해서만 만들어진다. 이름값도, 명성도, 과거의 업적도 바둑판 앞에서는 아무런 특권이 되지 못한다. 오직 한 수 한 수의 선택과 판단만이 기사의 가치를 증명한다.
그래서 기왕전이라는 이름은 가장 민주적인 왕을 의미한다. 누구에게나 도전의 기회가 열려 있고, 실력이 있다면 정상에 오를 수 있다. 반대로 아무리 위대한 기사라도 패배하면 왕좌를 내놓아야 한다. 왕이라는 이름이 가장 엄격한 검증을 받는 곳이 바로 바둑판이다.
기왕전은 단순한 대회명이 아니다. 그것은 바둑이 추구하는 최고 수준의 경쟁을 상징하는 이름이다. 왕좌는 영원하지 않지만, 왕좌를 향해 나아가는 도전은 계속된다. 그리고 그 도전이 있는 한, 기왕전이라는 세 글자는 언제나 바둑 팬들의 가슴을 뛰게 할 것이다.
바둑의 왕은 스스로 왕이라 말하지 않는다. 다만 승부가 끝난 뒤, 세상이 그를 왕이라 부를 뿐이다. 기왕전은 바로 그 순간을 기다리는 무대다.
[김학수 마니아타임즈 기자 / kimbundang@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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