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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박사 기자의 스포츠용어 산책 1874] 장기에서 왜 ‘초(楚)’라고 부를까

2026-08-14 06:57

[스포츠박사 기자의 스포츠용어 산책 1874] 장기에서 왜 ‘초(楚)’라고 부를까
장기판에서 붉은색 진영의 왕에는 ‘漢(한)’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맞은편에는 청색 진영의 왕 ‘楚(초)’가 자리 잡고 있다. (본 코너 1873회 ‘왜 장기에서는 ‘한(漢)’이라고 부를까‘ 참조)

장기에서 왕을 뜻하는 말로 이 두 글자를 쓴다. 중국 고대 역사에서 초나라의 항우와 한나라의 유방이 천하를 놓고 벌인 싸움을 옮겨놓은 형국이기 때문이다. 楚는 원래 ‘초나라’라는 고유명사로 만들어진 글자가 아니라, 본래 식물 이름에서 출발했다. 고대에 가시가 있는 나무, 가시나무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글자형도 ‘林(수풀 림) + 疋(발 소)’로 분석되며, ‘설문해자’에서는 楚를 ‘무성하게 모인 나무이며, 일명 荊(형)’이라고 풀이한다. 즉 무더기로 자라는 가시나무를 뜻했다는 설명이다. 이후 이 글자가 나라 이름으로 쓰이게 되어 ‘초나라 초(楚)’가 됐다. 실제 초나라는 춘추전국시대 양쯔강 중류 일대를 중심으로 성장한 나라였다. 따라서 초한(楚漢)의 ‘초’는 ‘가시나무’라는 일반적인 뜻에서 비롯된 글자가 나라 이름이 된 것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장기판에서 두 왕이 마주 보는 모습은 사실상 ‘유방과 항우의 대결’을 상징한다. 우리 전통 장기에서 두 진영을 초와 한으로 구분한다는 기록도 확인된다. 세계한민족문화대전 역시 장기를 ‘초(楚)와 한(漢)나라의 두 편으로 말을 움직이는 놀이’로 설명한다.
[스포츠박사 기자의 스포츠용어 산책 1874] 장기에서 왜 ‘초(楚)’라고 부를까


중국 천하를 처음으로 통일한 진시황이 세운 진나라가 무너진 뒤 중국은 혼란에 빠졌다. 그 혼란의 중심에 선 인물이 초패왕 항우와 훗날 한고조가 되는 유방이었다. 항우는 압도적인 무력과 카리스마를 가진 영웅이었다. 반면 유방은 항우만큼 뛰어난 무장이 아니었지만 사람을 모으고 인재를 활용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두 사람의 경쟁은 결국 천하를 건 전쟁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마지막 승자는 유방이었다. 항우는 해하에서 한나라 군대에 포위된 뒤 패퇴했고, 오강에서 생을 마쳤다. 유방은 마침내 한나라를 세우고 중국을 통일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말도 바로 이때의 이야기에서 나왔다. 장기판은 이 역사의 승부를 아주 재미있는 방식으로 오늘날까지 보존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장기판이 초한전쟁의 역사를 단순히 왕과 왕의 싸움으로만 표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차(車)가 있고, 포(包)가 있고, 마(馬)가 있으며, 상(象)과 사(士), 졸(卒)이 있다. 현대의 우리가 보면 그저 게임의 말들이지만, 전통적으로 장기판은 전쟁터를 축소해놓은 공간이다. 궁을 중심으로 군대가 배치되고, 병사들이 전진하며, 상대 진영의 왕을 몰아붙인다. 그래서 장기 한 판을 두는 일은 단순한 두뇌 게임을 넘어, 아주 오래된 전쟁의 기억을 놀이의 형태로 반복하는 일이기도 하다.

조선시대부터 우리 사회에서 초한의 이야기가 상당히 친숙했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초나라와 한나라의 싸움은 소설과 노래의 소재로 널리 활용됐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실린 ‘초한가’ 역시 초나라 항우와 한나라 유방이 천하를 다투던 이야기를 소재로 삼는다.

장기와 관련된 민요인 ‘장기타령’에도 이런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노래에서는 장기판의 한쪽을 한나라 유방과 연결하고, 다른 쪽을 초나라와 연결하면서 차·포·상·마 같은 장기의 말들을 역사 속 인물들과 대응시킨다. 장기판 자체가 하나의 역사극 무대였던 셈이다.

‘초’에는 항우의 영웅성과 비극이 겹쳐 있고, ‘한’에는 유방의 승리와 새로운 왕조의 탄생이 겹쳐 있다. 장기판에서 두 글자가 마주 서는 순간, 그 뒤에는 ‘누가 천하를 차지할 것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이 숨어 있는 것이다.

장기를 두면서 “초가 이겼다”, “한이 몰렸다”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2천 년 전의 전쟁을 아주 작은 판 위에서 다시 재현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더 재미있는 것은 역사의 승자와 패자가 장기판에서는 영원히 마주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 역사에서는 유방이 승리하고 항우가 패했다. 한나라는 중국 역사에서 거대한 왕조로 자리 잡았고, 항우는 패왕이라는 이름과 함께 비극적인 영웅으로 기억됐다. 하지만 장기판에서는 승자와 패자가 다시 똑같은 조건에서 만난다. 한의 장군도 초의 장군도 한 칸씩 물러설 수 있고, 초의 포도 한의 차도 상대의 진영을 위협한다. 역사는 승자를 결정했지만 장기판은 승부를 다시 시작하게 만든다.

[김학수 마니아타임즈 기자 / kimbundang@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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