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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박사 기자의 스포츠용어 산책 1811] 왜 바둑에서는 ‘불계’라고 말할까

2026-06-12 07:29

제31회 LG배 조선일보 기왕전 4강에서 맞붙게 된 신민준(왼쪽부터)과 양카이원, 왕싱하오와 신진서가  악수하고 있다. [한국기원]
제31회 LG배 조선일보 기왕전 4강에서 맞붙게 된 신민준(왼쪽부터)과 양카이원, 왕싱하오와 신진서가 악수하고 있다. [한국기원]
요즘 한중 최강의 기사들이 막판 경쟁을 벌이는 제31회 LG배 조선일보 기왕전에서 ‘흑 불계승’, ‘백 불계승’이라는 뉴스를 자주 듣는다. 2연패를 노리는 신민준 9단은 8강전에서 중국의 구쯔하오를 160수 만에 ‘백 불계’로 제압했고, 세계 1위 신진서 9단은 중국 랭킹 1위 딩하오 9단을 167수 만에 ‘흑 불계’로 꺾었다는 소식이다.

바둑을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다소 낯선 용어이다. 축구에서는 몇 대 몇, 야구에서는 몇 점 차 승리라고 한다. 하지만 바둑에선 ‘불계(不計)’라는 말을 사용한다. ‘不計’의 어원은 한자어로 ‘아니 불(不)’과 ‘셀 계(計)’의 합성어이다. 계산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용어는 일본 바둑계의 ‘후케이(ふけい, 不計)’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근대 바둑 기록 체계가 정비되는 과정에서 한국과 중국 바둑계에도 정착했다. 현대 한국기원 기록에서는 공식적으로 ‘불계승’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우리나라에선 조선시대부터 계산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불계라는 한자어를 썼다. 인터넷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不計라는 단어는 국역 9회, 원문 1,681회나 검색된다. 언론들도 개화기 이후 스포츠에서 不計라는 말을 사용했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 의하면 조선일보 1924년 5월23일자 ‘안주소년축구대회(安州少年蹴球大會)’ 기사는 ‘일(一),경기규정(競技規定)코노키ㄱ,헤ㄴ,푸리 키ㅅ,오프사이각일점(各一點)페ㄴ할틱 이점단(二點但)꼬ㄹ이생(生)할시(時)는페ㄴ할틱 은불계(不計)함’이라고 전했다. 당시의 옛 한글 표기와 한자 혼용체를 현대어로 옮기면 ‘일(一), 경기 규정(競技規定) 코너킥, 핸드, 프리킥, 오프사이드는 각 1점. 페널티킥은 2점. 다만 골이 생길 시에는 페널티킥 점수는 계산하지 아니함‘이라는 내용이다. 당시에도 불계라는 말을 일반적으로 사용했음을 이 기사를 보여준다.
영어권에서는 바둑 용어로 같은 상황을 보통 "win by resignation"(상대의 기권으로 승리)이라고 표현한다. 반면 동아시아 바둑 문화권에서는 승자의 입장보다 ’계가(집 계산)를 하지 않았다‘는 결과 기록 방식에 초점을 맞춰 불계라는 용어를 사용해 왔다.

바둑에서 승패는 원래 집 수를 계산해 결정한다. 대국이 끝나면 양측의 집과 사석을 정리해 누가 더 많은 영역을 차지했는지 따진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굳이 마지막까지 계산할 필요가 없어진다. 예를 들어 한쪽의 대마가 잡혀 버렸거나, 형세 차이가 너무 커서 더 두어도 역전이 불가능한 상황이 되면 패색이 짙은 쪽은 돌을 거두고 패배를 인정한다. 이를 ‘투항’ 또는 ‘기권’에 해당하는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이때는 집 수를 실제로 세지 않았으므로 결과를 “몇 집 승”이라고 기록할 수 없다. 그래서 ‘계산하지 않고 승부가 났다’는 의미로 불계승이라고 기록하는 것이다.

바둑은 승패의 기준이 집 수에 있기 때문에, 정상적으로 끝난 대국은 대부분 ‘3집 반 승’, ‘7집 반 승’처럼 구체적인 수치가 남는다. 반면 불계승은 그 숫자조차 필요 없을 만큼 승부가 명확해졌음을 뜻한다. 따라서 불계라는 말 속에는 단순한 기록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다. 상대가 더 이상 대국을 이어갈 실익이 없다고 판단한 순간, 이미 승부는 결정되었다는 선언인 셈이다.

프로 바둑에서는 오히려 불계승이 더 자주 등장한다. 정상적인 계가까지 가는 경우도 많지만, 기사들은 형세 판단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패배가 확실하다고 느끼면 미련 없이 돌을 거둔다. 승산이 없는 바둑을 끝까지 두는 것은 상대에 대한 예의에도 어긋난다고 여겨져 왔다. 그래서 프로 기사들의 기보를 보면 불계승이라는 결과가 빈번하게 나타난다.

[김학수 마니아타임즈 기자 / kimbundang@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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