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 출전한 북한 조효남[EPA=연합뉴스 자료사진]](https://cgeimage.commutil.kr/phpwas/restmb_allidxmake.php?pp=002&idx=3&simg=202604020744460307405e8e9410871751248331.jpg&nmt=19)
외래어 ‘그립’은 영어 ‘grip’를 음차한 말이다. 무언가를 잡는 방식이나 손에 닿는 느낌을 의미한다. 이 말은 미끄러지지 않는 안정성, 심지어는 몰입시키는 힘까지 넓게 확장된 의미로 일상에서 쓰이고 있다.
grip은 영어 동사이자 명사로 ‘꽉 잡다’, ‘붙들다’, ‘지배하다’라는 뜻을 갖는다. 그 뿌리는 고대 게르만어 계열로 거슬러 올라간다. 특히 고대 영어 ‘gripan’또는 ‘grippan’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며, 이 단어는 “붙잡다, 움켜쥐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 계열은 더 넓게 보면 게르만 공통어(Proto-Germanic) ‘gripanan’으로 재구성되며, 같은 뿌리에서 나온 단어들이 여러 언어에 남아 있다. 예를 들어 독일어 ‘greifen(붙잡다)’도 같은 어원을 공유한다. grip은 원래부터 “손으로 무언가를 강하게 잡는 행위”를 핵심 의미로 갖고 있던 단어인 것이다.
한국어 그립은 이런 영어 단어를 그대로 들여온 외래어이다. 특히 스포츠(골프, 테니스), 헬스, 자동차 등 서구 문화와 함께 들어온 분야에서 먼저 자리 잡았고, 이후 일상어로 퍼졌다.
우리나라 언론은 1950년대 이후 그립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 따르면 조선일보 1969년 11월27일자 ‘미키맨틀 희대(稀代)의 장타(長打)솜씨’ 기사는 ‘〇…세계적인장타자(長打者)는 누구냐?그는 아마도 미(美)프로야구(野球)의 스타이던 미키 맨틀일거라는 이야기다.왕년의 홈런왕(王) 베브루드,타격(打擊)과 도율(盗塁)의 신(神)타이 캅도 프로못지 않는롱 히터에 숏게임의 명수(名手)이었다. 그런데 맨틀이 아놀드파머를 물리쳤다하여 화제가 되었다.이는 지난달텍사스주(洲) 달라스에서 열린 바이론 넬슨클래식경기에 앞서 프로—아마 혼합(混合)경기가 있었는데 맨틀이 장장(長長) 3백98야드를 쳐낸데서 나온 것. 그는 14홀에서 3번우드를 섰으며 더우기 이홀은 다운힐이 없는데다가 습기가 많았고 바람은 역풍(逆風)이었다니 정말 슈퍼 롱히트인셈이다.이뉴스에 팬들은 3백98이란2백98의 착오가 아니냐고믿으려 들지 안했다는 것. 또 맨틀은 5백90야드3번홀에서 드라이버와 6번아이언으로 온시킨데 반해,파머는 드라이버와 3번아이언으로 겨우 온시켰다고—.외신은 맨틀의놀라운 장타(長打)는 ①강(強)한 그립 ②강렬한 손목과 ③거기서 나오는 편치에서나온것이라고 풀이’라고 전했다. 이 기사에서 말하는 ‘그립’은 단순히 “잡는다”는 뜻을 넘어서, 타격력의 근본이 되는 손의 힘과 잡는 방식을 의미이다.
북한에선 그립을 순우리말 ‘쥐기’라고 부른다. ‘쥐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쥐기’는 의미 전달이 명확하면서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토박이말이다. 외래어를 쓰지 않아도 충분히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북한식 언어 정책의 방향성과 잘 맞아떨어진다.
북한 언어의 특징 중 하나는 기능성과 직관성을 중시한다는 점이다. ‘그립’은 해당 용어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의미가 모호할 수 있지만, ‘쥐기’는 동작 자체를 그대로 설명하기 때문에 직관적이다. 이러한 표현 방식은 교육과 선전의 효율성을 높이는 데에도 유리하다.
북한은 건국 이후 지속적으로 ‘문화어’ 정책을 통해 언어를 정비해왔다. 그 핵심은 외래어, 특히 영어식 표현을 최대한 배제하고 고유어 중심으로 언어를 순화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언어 정리가 아니라, 사상적 자립과 문화적 독자성을 강조하기 위한 전략이기도 하다. 외래어 사용을 줄이는 것은 곧 외부 문화의 영향을 차단하고, 체제 내부의 결속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기능한다.
남한의 입장에서 보면 쥐기라는 표현이 다소 어색하거나 전문성이 떨어져 보일 수도 있다. 이는 우리가 이미 외래어 중심의 용어 체계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북한에서는 그립이라는 표현이 오히려 낯설고 불필요한 외래어로 여겨질 가능성이 크다.
[김학수 마니아타임즈 기자 / kimbundang@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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