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28일 전북 무주군 태권도원 수련장. 푸른 매트 위를 단단히 딛고 선 맨발들이 바닥을 묵직하게 울렸다. 검은 띠에는 '육군사관학교'라는 금빛 글자와 이마에는 '화랑', '열정' 글귀가 적힌 검은 머리띠를 질끈 동여맸다. 절도 있는 기합 소리와 거친 숨소리가 거울 벽면을 꽉 채웠다. 구령에 맞추어 천천히 팔을 뻗고 중심을 잡는 수련자들의 동작 하나하나에 오랜 세월 단련된 내공이 묻어난다. 수련을 마친 뒤 일제히 엄지를 치켜세우며 환하게 웃는 노병(老兵)들의 얼굴에는 청년 못지않은 굳건한 패기가 가득했다. 은발의 퇴역 장교들이 다시 도복을 입고 등장한 열정 가득한 수련 현장이다.
군 복무 시절 태권도 시범단에서 맹활약했던 60대 후반에서 70대 초반의 베테랑들이다. 이들은 세계어린이태권도연맹(WCTU·총재 이상기)이 주관한 '경락품세 세미나 및 지도자 교육'에 참여해 어르신들의 건강을 책임질 '시니어 지도자'로 거듭나기 위한 훈련에 돌입했다. 각 분야에서 최고의 기량을 뽐냈던 무도인들이 초고령사회의 보건 위기를 타개할 구원투수로 나선 셈이다. 대한민국 시니어 체육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마중물 역할을 하고 있다.

◇"노년의 신체는 우리가 가장 잘 안다"… 노노(老老) 케어의 정수
고령층을 지도할 때 겪는 가장 큰 난관은 신체적 한계에 대한 공감 부족이다. WCTU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년기의 신체 변화와 심리적 위축감을 정확히 이해하는 동년배 베테랑 무도인들을 내세웠다. '화랑 시니어 태권도팀'으로 명명된 이들은 평생 연마한 무도를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굳건한 사명감으로 똘똘 뭉쳤다.
권경식 경락품세연구소 소장은 "육사 출신을 주축으로 럭비, 유도, 검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무도인들이 합류했다"며 "청년들의 태권도가 스피드와 유연성, 강한 타격에 집중한다면, 노인들의 태권도는 신체에 충격을 주지 않으면서 호흡과 기(氣)를 조화롭게 다스리는 방식이어야 한다"고 지도자 교육의 방향성을 설명했다. 이어 "도복이 주는 특유의 경건함 덕분에 어르신들이 1시간 전부터 수련장에 나와 준비할 정도로 마음가짐이 달라진다"며 "동년배 지도자들이 가르치는 충효예(忠孝禮)의 정신은 노년층의 자긍심을 높이고 우울감을 떨쳐내는 강력한 무기"라고 강조했다.

◇한의학과 무도의 융합… 정교해진 '경락품세' 커리큘럼
지도자 양성 과정의 핵심은 동작 암기가 아니다. 인체 내부의 에너지 흐름을 이해하고 이를 태권도에 결합하는 학문적 수련이 선행된다. 국내 '기(氣) 박사 1호'로 불리는 김종업 박사는 "인체 안에 흐르는 보이지 않는 에너지의 흐름을 경락(經絡)이라 부른다"며 "품세라는 몸의 움직임을 수행하며 내 스스로 에너지 흐름을 체감하는 훈련이 필수적"이라고 역설했다. 김 박사는 "지도자가 기운을 먼저 체득하고 체화해야만 수련생들에게 올바른 경락품세를 가르칠 수 있다"며 "기본 이론 뒷받침 없이 껍데기 동작만 흉내 내는 방식은 철저히 배격한다"고 덧붙였다.
화랑 시니어 태권도팀 관계자는 "이 동작을 수행하면 경락의 어느 부위가 활성화되는지 의학적·체육학적 데이터를 축적하는 연구를 진행 중"이라며 "과학적으로 합리적인 데이터가 도출되면 국내를 넘어 글로벌 시장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막강한 잠재력을 지녔다"고 내다봤다. 중국, 동남아 등 길거리에서 자연스럽게 기 체조를 즐기는 해외 사례처럼, 한국의 경락품세가 세계 시니어 체육의 표준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탄탄한 이론적 토대를 다져가고 있는 셈이다.
◇17개 시도 거점 확보… '단기 이벤트' 한계 극복 과제
현재 전북 무주군(군수 황인홍)에서 진행 중인 실버 태권도 교실은 폭발적인 반응을 얻고 있으나, 단기 예산으로 편성돼 교육의 연속성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권 소장은 이를 타개하기 위해 중앙 정부와 지자체의 정책적 결단이 시급하다고 진단했다. 권 소장은 "어르신들이 사비를 들여 수련을 이어가기에는 현실적인 제약이 크다"며 "문화체육관광부나 보건복지부가 주도해 정책 예산을 편성하고, 전국 17개 시도 노인복지관이나 거점 체육관에 정규 강좌를 개설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전문 교육을 이수한 시니어 강사들이 각 지역으로 파견돼 활동할 수 있는 구조적 판을 깔아줘야 전국적인 확산이 가능하다는 논리다. 아울러 권 소장은 "어르신들이 움직이지 않아 누적되는 의료비 부담을 고려하면, 체계적인 실버 체육 지원은 국가 재정 측면에서도 궁극적으로 이익을 가져다주는 확실한 투자"라고 단언했다. 지자체가 예산과 장소를 제공하고 훈련된 지도자들이 교육을 맡는 선순환 구조가 정착되어야만 진정한 의미의 예방의학이 실현될 수 있다는 뜻이다.

◇초고령 사회에 국민건강보험 재정난 살릴 구원투수
시니어 헬스케어 프로그램의 전국 보급은 태권도계의 절박한 생존 전략에도 있다. 저출생 장기화로 학령인구가 급감하면서 일선 태권도장들은 심각한 경영난에 허덕이고 있다. 유소년 수련생에게만 의존하던 기존의 수익 모델은 이미 수명을 다했다. 산업적 위기를 극복할 돌파구가 다름 아닌 '시니어 계층'이다. 오전에 비어 있는 일선 태권도장의 유휴 공간을 실버 헬스케어 교육장으로 활용하면, 체육관은 새로운 수익 창출의 활로를 열고 지자체는 막대한 시설 투자비를 절감하는 상생 구조가 완성된다. WCTU가 육성하는 시니어 지도자들은 융합 모델을 현장에서 지휘할 핵심 동력이다.
이상기 WCTU 총재는 퇴역 장교 무도인들이 뿜어내는 열정과 경락품세의 의학적 가치를 융합해 실버 태권도 활성화에 사활을 걸었다. 무주군의 현장 검증을 거쳐 체계화된 경락품세 지도자 교육이 전국 보급망에 무사히 안착한다면, 시니어 태권도는 고령화 시대 의료비 증가를 억제하는 든든한 방패이자 침체된 태권도 산업을 부활시킬 가장 강력한 엔진으로 등극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유정우 마니아타임즈 선임기자 / kedsport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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