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스포츠 100년](73)런던올림픽, 험난한 여정④대통령까지 나서 화합을 촉구한 심각한 후유증 겪어

정태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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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1-06-09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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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런던올림픽 시상대에 선 김성집(오른쪽)[스포츠영웅 김성집 평전에서]
갈 때는'조선 선수'로 귀국할 때는'대한민국 선수'로
그래도 런던 하늘에 태극기를 휘날리게 한 선수가 있었다. 바로 김성집과 한수안이다. 역도선수로는 전성기를 지난 29세에 런던올림픽에 출전한 김성집은 미들급에서, 복싱에 출전한 한수안은 플라이급에서 동메달을 땄다. 메달 한 개 없어 애를 태우던 대회 막판에 나온 소중한 동메달이었다.

런던올림픽은 점수제를 채택해 국가별 순위를 매겼다. 종합 1위는 645.5점을 딴 미국이 차지했고 347점의 스웨덴, 224점의 프랑스가 뒤를 이었다. 우리 선수단은 137.5점으로 59개 참가국 가운데 24위에 올랐는데 이는 아시아권에서는 인도에 이어 2위에 해당하는 것이다.

하계올림픽에 첫 출전한 선수단은 동메달 2개를 앞세우고 귀국했다. 식민 지배를 갓 벗어난 극도의 혼란 속에 주먹구구식으로 선수를 뽑아 제대로 훈련조차 하지 못한 채 참가한 올림픽에서 건진 동메달 두 개의 가치는 차고도 넘쳤다.

비록 기대했던 마라톤에서 고배를 마시기는 했지만 선수단을 맞이하는 국민들의 시선은 따뜻했다. 독립된 국가로 태극기를 달고 세계무대에서 당당히 겨룰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런던올림픽 출전은 국민 모두에게 충분히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특히 런던으로 출발할 때는 아직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으로 조선선수단으로 참가했으나 귀국할 때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어엿한 대한민국 선수단으로 신분이 천양지차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런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사단이 벌어졌다. 선수 선발과정에서 빚어진 말썽으로 런던으로 떠나기 전 사표를 제출한 집행부의 거취를 논의하기 위해 9월 3일과 4일 이틀 동안 열린 조선체육회 임시평의원총회 자리에서였다. 이 자리에서는 런던올림픽의 성적 부진도 도마 위에 올랐다. 입상이 유망하다고 호언했던 종목들이 줄줄이 초반 탈락한 것에 대해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언론도 선수단 구성의 문제점을 일제히 지적했다. 다음은 런던올림픽 패인을 구명한 1948년 8월 21일자 경향신문의 기사를 발췌한 것이다.

… 이번 런던올림픽대회에서의 참패 원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본부진을 비롯하여 선수진에 이르기까지 마땅히 감당할 만한 책임을 수행할 수 있는 그네들을 못 보게 된 것과, 당연히 가지 못할 그네들이 갔으며 가게 된 동기에 확실한 참패원인이 있는 것도 알아야 한다. 올림픽 목적이 승패를 초월하고 오직 참가함에 목적이 있다고는 하나 벌서 참가함으로부터 딸리는 것은 묻지 않아도 승패를 분간하는 경기가 있다는 것쯤이야 세상이 다 알고 있지 않은가. 그저 유람 격으로 이번 대회를 노리고 덥어놓고 가야만 되겠다는 갈 주의에 사로잡혀 세상에서 욕을 하든지 내 목적을 달성함에는 여하한 수단도 가리지 않겠노라하고 무조건하고 런던 행을 지원한 사람도 있었다. 이 반면에는 이번 올림픽에는 꼭 이 사람이 가야만 된다고 믿는 그 사람이 결국 못 가게 된 것도 있다. 그렇다면 이번 패인에 즉접 관계가 있는 대표단 선정에 있어 공명정대하게 처사를 하지 못한 책임은 누가 지는 것이냐 하면 지난 6월 7일 KOC의 승인을 받어 그 익일인 6월 7일에 올림픽 대표선수단 명부를 정식으로 사회에 발표한 조선체육회가 전 책임을 지고 송두리째 맡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나 그 뿐이랴. 조선이 올림픽 참가 초청을 받어 대표선수단이 조직되어 선수단이 6월 21일 장도에 오르기까지 무려 60여회의 회의는 무엇을 의미하였나. 그 회의 내용은 물론 선수선발 문제뿐이 아니요 기타 여러 가지 문제를 토의하였는지 모르나 대부분이 대표단 파견 문제를 싸돌고 의론하였으리라. 이리하여 오늘 당선된 감독과 선수는 내일에는 낙선된 일도 있었고 오늘 낙제된 임원이 내일 또다시 당선된 일도 있다. 본부진이면 본부진의 책임, 감독진이면 감독의 직책, 선수이면 선수다운 행동을 하지 못한 원인도 실로 여기에 있었다. …

이미 사표를 제출한 정환범 회장과 집행부 사표는 수리됐다. 선수단 간부들에 대한 징계도 이 자리에서 결정됐다. 올림픽 기간 도중 런던에서 열었던 여운형 전 조선체육회장 추도식 문제와 관련해 그 책임자로 지목된 선수단 총무 정상윤을 추궁하던 끝에 난투극까지 벌어져 총회 자리는 한 때 아수라장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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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 대한민국 정부수립 전후에 이르기까지 혼란기 대한체육회장 면면들. 11대 여운형, 13대 정환범, 14대 신익희, 15대 신흥우 회장(왼쪽부터)
우여곡절 끝에 신익희 국회의장을 회장으로 하는 제14대 집행부가 출범했다. 집행부 명단은 다음과 같다.
△회장=신익희 △부회장=김동성 옥준진 △이사장=이성주 △이사=김원권 김윤근 김정학 김태식 백용호 전이락 이종호 이성환 △감사=김용택 박영진 서형석

또 각 부서 책임자로 사무국장에 이종호, 사무차장에 이순재, 재정책임위원에 전이락, 기획책임위원에 이성환, 보건후생책임위원에 백용기, 자재책임위원에 김정학, 시설책임위원에 김원권 백용기, 경기책임위원에 김태식, 선전책임위원에 김윤근을 각각 선임했다.

한편 평의원총회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함에 따라 헌장을 개정해 조선체육회의 명칭을 대한체육회로 바꾸었다. 이에 따라 경기단체를 비롯한 각 체육단체도 모두 문패를 ‘조선’에서 ‘대한’으로 바꿔 달았다. 광복 후 전국종합경기대회 또는 조선올림픽대회라는 이름으로 개최했던 대회도 전국체육대회로 부르기로 했다.

이에 따라 10월 20일부터 7일 동안 서울운동장에서는 제29회 전국체육대회가 열렸다. 앞서 9월 4일에는 서울운동장 수영장에서 하계대회인 수영경기가 치러졌다. 당시만 해도 실내수영장이 없었기에 수영경기는 더운 계절에 따로 치를 수밖에 없었고 성적도 전국체육대회 종합점수에 반영되지 않았다. 하계대회는 1969년까지 열리다 태릉선수촌에 실내수영장이 마련된 1970년 제51회 전국체육대회부터 통합돼 열리게 된다. 제29회 전국체육대회 동계대회는 1949년 1월 22일부터 이틀 동안 한강특설링크에서 개최됐고 스키 종목은 울릉도에서 적설량 부족으로 노르딕 경기만 열렸다.

대통령이 화합 촉구
런던올림픽 파견선수 선발과정에서 빚어진 잡음 때문에 대한체육회 집행부까지 교체된 마당이었지만 말썽은 여전했다. 해외여행이 사치로 여겨졌던 시절이기에 외국에서 열리는 대회에 참가하는 것은 특전이나 다름없었다. 좁은 문인 국가대표가 되기 위해 학연과 지연이 동원돼 파벌싸움으로 이어져 불미스러운 일들이 그치지 않았다.


올림픽이나 아시아경기대회 등 종합대회 뿐 아니라 단일대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1949년 4월 제53회 보스턴마라톤 대표선수 파견을 놓고 벌어진 대한육상경기연맹 분규다.

전말은 이랬다. 4월 19일 열리는 보스턴마라톤을 앞두고 대한육상경기연맹은 전년 대회 우승자인 서윤복과 최윤칠 홍종오 등 선수 3명과 인솔자 이태환, 감독 손기정, 트레이너 김혁진 등 6명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이 중 이태환은 개인 사정으로 빠지게 됐는데 선수단 여비 문제 등으로 말썽을 일어 네 차례나 출발이 연기됐다. 이에 손기정과 서윤복이 “이렇게 늦게 떠나면 컨디션 조절에 차질을 빚어 좋은 성적을 낼 수 없다.”며 출국을 거부하자 정일형 대한육상경기연맹 회장이 설득해 선수 3명만 떠나기로 최종 결정했다.

문제는 떠나는 날 세 선수 외에 빠지기로 했던 김혁진 트레이너까지 나타나면서 발생했다. 선수단 감독 문제로 옥신각신하다가 급기야 난투극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 통에 서윤복과 홍종오는 다시 돌아와 버리고 김혁진과 최윤칠만 출국했다. 문제가 커지자 외무부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도쿄에 가 있던 김혁진과 최윤칠에게 즉각 귀환하라는 전문을 띄웠다. 2년 전 우승자까지 배출한 우리나라가 연맹 임원들의 갈등으로 출전조차 하지 못하게 됐으니 기막힌 일이었다.

당시의 상황을 최윤칠은 이렇게 회고한다.

“1949년 3월 보스턴마라톤 파견 예선대회에서 전반은 강한 앞바람으로 1시간 17분에, 후반은 1시간 13분에 주파해 2시간 30분으로 우승했다. 2착의 홍종오 선수와 예선 없이 선발된 서윤복 선배와 함께 스타트를 앞두고 연습을 하는데 코치 문제로 김혁진 손기정 두 선배가 팽팽히 싸우더니 출발 당일에는 비행장에서 치고받으며 혈투까지 벌어졌는데 그 자리에서 임시 이사회를 소집해 서윤복 선수와 홍종오 선수는 한국에 남고, 나와 김혁진 선배만 보스턴마라톤에 참가하도록 결정돼 도쿄의 하네다 비행장에 도착했다. 항공사 직원이 나오더니 ‘두 사람 다 나라에서 돌아오라는 전화가 있었으니 일주일 후에 다음 서울 가는 비행기 편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참으로 앞이 캄캄하고 속에서는 피가 끓었다. 그곳에서 일주일간 트랙 연습을 하다가 귀국해 3일 만에 학교대항 육상경기대회에서 1500m를 3분57초6으로 한국신기록을 세우며 우승했다. 그 때 나는 컨디션이 절정이었는데, 그 컨디션 상태로 세계무대에 나가 한 번 겨뤄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 기회를 놓치게 되자 정말 땅이 꺼지기라도 한 듯이 안타까웠다. 그 후로 육상경기연맹은 싸우는 단체가 돼 사회에서 많은 지탄을 받았다.”

이렇게 큰 물의를 빚자 대한체육회는 긴급이사회와 상벌위원회를 열어 성명서를 발표하고 △보스턴마라톤대회 참가 중지 △대한육상경기연맹 회장 부회장 이사장 이사와 감사 전원의 총사퇴 △황대선 이사장의 체육단체 피선거권 2년간 박탈 △손기정 김혁진 등 4명에 대한 1년 간 근신처분을 결의했다.

또 대한체육회도 책임을 지고 4월 30일 정기총회에서 회장단을 제외한 이사진을 개편했다. 개편된 이사진은 황대걸 이종호 김용구 김윤근 김태식 이종구 이순재 한병철 최인호 손효준 이유형 이규환 등 개인 자격 이사와 강원도 충청남도 경상북도 등 지방 단체 대표 1명씩 모두 15명으로 구성됐다. 대한체육회는 또 선수단이 해외원정을 나갈 경우 초청 케이스건 자비 참가건 간에 엄격히 심사하기로 하고 해외파견선수 심사규정을 제정했다.

그러나 사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0월 4일 대한체육회 총재인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체육회 간부들을 중앙청으로 불러 체육인들의 인화 단결을 촉구한 것이다. 이에 대한체육회는 10월 29일 임시평의원회를 소집해 헌장을 개정하고 집행부 총사퇴와 함께 신흥우를 제15대 회장으로 추대한다.

충청북도 청원 출신인 신흥우는 배재학당을 졸업한 뒤 1896년 서재필 등과 함께 협성회를 창설한 인물이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사우스캐롤라이나대를 졸업한 신흥우는 1911년 배재학당 교장으로 취임하고 1920년에는 조선체육회 발기인으로 참여해 일제강점기 체육 발전에 이바지했다.

이후 1927년 신간회 조직에 참여하고 1932년 YMCA 총무를 역임한 신흥우는 1925년 9월부터 1927년 7월까지 조선체육회 제7대 회장으로 재직해 조선체육회와 대한체육회 회장을 모두 맡은 특이한 기록의 주인공이 되었다.

신흥우가 대한체육회장으로 추대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이례적으로 ‘이사진 조직에 친소(親疎)를 초월하라.’는 내용의 공함(公函)을 발송했다. 개인적인 친소관계를 떠나 정당한 인격으로 체육사업에 중요한 역할을 할 인사, 잡음이 없고 명예를 지키는 훌륭한 인사를 뽑아 체육계에 모범이 되라는 당부가 담겨 있었다. 또한 재정부 조직에 주의를 기울여 사소한 금액이라도 수지를 분명히 해 의혹이 남지 않도록 하라는 주문도 있었다. 대통령이 직접 나설 만큼 당시 체육계의 내분과 갈등은 심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흥우 회장과 함께 구성된 제15대 집행부의 면면은 부회장 현동완 손기정, 이사 현정주 김정연 이종호 정상희 이영민 이순재 김태식 김신실 서복희 김영구 나구건 김옥규 황을수 김성곤 이근창 김재위 등이었다.

[정태화 마니아타임즈 기자/cth082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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