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스포츠 100년](43)마라톤이야기④'마라톤왕' 김은배(하) '절대로 나를 앞서 달리지 마라'

정태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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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0-10-31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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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 마라톤 출발하는 모습
절대로 나를 앞서 달리지 마라”
비록 일장기를 달고 출전하지만 조선 선수로 첫 세계 스포츠 무대에 출전하는 김은배와 권태하는 1932년 6월 12일 오후 9시 양정고보 수백 명의 학생들을 비롯해 서울에 있는 체육관계자들의 환송을 받으며 경성역을 출발해 부산으로 향하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우리의 마음, 바다 저 편에’라는 리본을 가슴에 단 환영객들은 “기어코 조선 사람으로서 이기고 돌아오라‘는 격려 인사에 김은배와 권태하는 ”이 기분 이대로 미국에서 힘껏 싸워 꼭 이겨 돌아올 때를 기다려 주시오“라며 답사를 하면서 전의를 불태웠다. 두 선수의 장도를 위해 여행 중 상비약으로 조선매약주식회사에서는 ’영신화‘ 한 상자를, 경성역 맞은 편 성명신 제5지점에서는 과일 한 상자를 기증할 정도로 이들에 대한 전 조선인들의 기대는 남달랐다.

부산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두 선수는 6월 23일 요코하마를 출발해 하와이를 거쳐 올림픽 개막일인 7월 30일을 20일쯤 앞둔 7월 10일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훈련에서부터 차별대우였다. 1920년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중·장거리 선수로 핀란드 육상 영웅 파보 요한네스 누르미가 출전한다는 소식에 긴장을 했지만 달리기에서 돈을 받았다는 이유로 결국 출전이 좌절되면서 현지에서는 마라톤 강력한 우승후보로 세계기록을 세운 김은배를 꼽았다.

일본은 이 소식이 전혀 달갑지 않았다. 일본인 임원인 고야마는 츠다를 우승시키기 위해 농간을 부리기 시작했다. 고야마는 츠다에게만 코스 답사를 시켰다. 딱딱한 콘크리트 포장도로를 달리는 데 알맞은 탄력이 좋은 신발도 츠다에게만 주었다. 김은배와 권태하는 코스 사정도 전혀 모른 채 서울에서 흙바닥을 달릴 때 신은 홑버선 신발 그대로였다.

오랜 선상생활에서 쌓인 피로가 그대로 누적 된데다 제대로 된 신발도 신지 못한 채 딱딱한 콘크리트 바닥을 달리는 바람에 두 선수는 무릎과 허리에 통증을 느꼈다. 세달 사이에 세 차례나 풀코스 마라톤을 완주한 권태하의 컨디션은 더 엉망이었다. 어쩔 수없이 두 선수는 육상 감독인 오다에게 호소를 한 뒤에야 겨우 고야마의 농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고야마의 농간을 벗어났는가 싶었으나 이번에는 코치 겸 선수로 출전한 츠다가 한술 더 떠 이것저것 간섭하기 시작했다. 츠다는 권태하와 김은배에게 “너희 두 사람은 경기할 때 나를 앞지르지 마라. 나를 선두로 해서 두 사람은 그 뒤를 따르라. 이것이 일본이 필승을 거두는 팀워크이자 절대조건이다”라고 요구했다. 츠다는 권태하와 김은배를 소위 말하는 페이스메이커로 활용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아직 어린 학생이었던 김은배는 츠다의 이 지시를 무시할 수 없었다. 권태하는 이를 무시했지만.

권태하와 김은배, 그리고 츠다는 7월 23일 처음으로 마라톤 전 코스를 사전 답사 겸 기록 측정을 했다. 개막 일주일 전이었다. 츠다는 경기장 마지막 한 바퀴 도는 것을 중지하고 잰 시간이 2시간30분58초였다. 전 코스 기록으로는 2시간34분쯤으로 예상됐다. 권태하는 21마일, 김은배는 19마일만 달렸다. 이는 아직 코스에 익숙하지 못해 자중하기 위해 중지한 것이었다. 이것만 보아도 김은배와 권태하가 얼마나 차별대우를 받았는지 증명이 되는 셈이다.

첫 출전 올림픽에서 김은배 6위, 권태하 9위

로스앤젤레스올림픽 마라톤은 8월 7일 오후 3시30분(현지 시간)에 15개국 28명의 선수들이 참가한 가운데 펼쳐졌다. 올림픽 스타디움을 2바퀴 돈 뒤 후버~버몬트~잉글우드~웨스턴~슬로손~산타바바라를 거쳐 다시 올림픽 스타디움으로 되돌아오는 로스앤젤레스 시내를 일주하는 코스였다.

수건을 머리에 질끈 동여맨 김은배, 장신의 외국 선수들 틈에 선 권태하, 그리고 츠다는 큰 수건을 목에 두르고 스타트라인에 섰다. 총성 신호와 함께 힘차게 출발한 선수들은 첫 바퀴째 츠다가 10위, 그 뒤 5~6명 뒤쪽에 김은배와 권태하가 따랐으며 둘째 바퀴에서는 1진과 2진이 나누어진 가운데 2진에 포함돼 스타디움을 빠져 나갔다.

김은배는 총 42.195㎞ 레이스 과정을 양정고보 교지에 상세하게 밝혔다.

“오후 3시 30분 스타디움으로부터 스타트했다. 선수는 28명인데 2열종대로 서서 나는 후열에 끼여 있었다. 환호성 속에 스타트하자 아르헨티나 자바라 선수는 곧 4m 앞서서 뛰고 나는 13위 정도로 뛰고 있었다. 운동장을 두 바퀴 돌 때 권태하가 쑥 빠져 나간다. 나도 따라 나갔다.

조금 후 우리 3인은 일단으로 됐다. 권태하, 츠다는 원기 있게 뛰었다. 나는 평상시보다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권태하, 츠다에게서 떨어지게 됐다. 7마일 반부터 무의식 상태에 다리도 움직이지 않았다. 8마일 근처에서 조금 원기를 회복했으나 다음 직코스에서는 완전히 쇠약해져 빈사상태였다. 응원 소리도 들리지 않고 사람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이 상태로 9마일에 있는 두 번째 음료 설치대에 도착했다. 나는 여기서 포도즙을 마시고 뛰기 시작했다. 9~14마일 구간은 태평양 연안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향하여 뛰는데 언덕도 있고 연안에는 집이 없는 평야며 가로수가 펼쳐져 있다. 이를 악물고 12마일 반까지 달린 나는 다시 원기를 회복하여 16마일 반 근처에서 나를 앞지른 아르헨티나, 미국 선수를 추월하여 유유히 달렸다. 17마일 반 지점에서 멕시코 선수를 추격하여 앞지르니 겨우 9번째였다.

멕시코 선수는 10000m에서 7위를 한 우수한 선수이며 마라톤에 능한 선수다. 전력을 다해 19마일 반에 도착하니 불과 넉 달 전인 4월 3일 경인역전대회 때 부상한 왼쪽 다리에 경련이 일기 시작했다. … 이 언덕 중간쯤 가니 머리를 들고 대단히 피로한 듯 뛰고 있는 권태하 선수가 보였다. 나는 스피드를 내며 권 선수에게 접근하였다.

내가 여기서 “뜁시다”라고 말하니 “위장이 아파 틀렸다”며 비통한 안색을 보였다. 나는 할 수 없이 권 선수와 헤어져 선행자를 추격하였다. 23마일 지점에서 체코의 헬거를 제치고 24마일 지점에 도착하여 미국 선수 메트켈손마저 가뿐이 따돌렸다. 이에 승패의 운수는 이미 결정되어 6위를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올림픽 기념탑에 마라톤 귀착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수만 관중의 박수소리를 받으려 골인했다.”

결과는 아르헨티나의 자바라가 2시간31분36초로 우승을 차지했으며 영국의 페리스가 2시간31분59초로 2위, 핀란드의 토보이넨이 3위(2시간32분13초)였으며 츠다는 5위(2시간35분42초), 김은배 6위(2시간37분28초), 권태하 9위였다.


당시 올림픽 개인전의 경우 시상은 1~3위까지는 메달과 상장, 4~6위는 상장을 수여해 입상으로 간주했다. 이에 따라 김은배는 당당히 6위에 입상했다. 하지만 아쉬움도 남았다. 권태하와 츠다가 골인하자마자 졸도를 한데 견주어 김은배는 크게 지친 표정이 없이 골인해 마지막에 스피드를 내었더라면 좀 더 나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은배도 한참 뒤 당시를 회상하면서 절대로 자신을 앞서지 말라는 츠다의 말을 들은 것을 후회했다.

츠다는 경기가 끝난 뒤 “막상 경기가 시작되자 조선 선수들이 나의 요구를 무시하고 마구 앞으로 뛰쳐나가는 바람에 페이스를 잃어 우승을 놓쳤다”고 주장했다. 츠다의 주장에 분개한 권태하는 “츠다가 있는 일본 팀과는 행동을 같이 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미국에 남아 남캘리포니아 대학에 입학하고 조선에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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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에 참가한 마라톤의 권태하, 김은배, 복싱의 황을수 선수를 환영회에 모인 로스앤젤레스 교민들.
조선의 의기를 국제무대에 떨치고
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해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한 권태하와 김은배, 그리고 복싱의 황을수는 교민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는 교민 단체인 국민회 청년부는 7월 30일 한인단체들과 합동으로 올림픽에 출전하는 세 선수들에 대한 환영회를 성대하게 개최했다.

이 환영회에서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맏아들인 필립 안이 사회를 보고 국민회 최능익 회장의 환영사에 이어 세 선수들이 답사를 했으며 환영식이 끝난 뒤에는 환영무용회와 함께 흥겨운 저녁 식사가 이어졌다. 특히 권태하는 환영무용회에서 대단한 댄스실력을 선보여 6~70여명의 우리 교민들로부터 댄스 제의를 받는 등 인기를 끌었다. 이처럼 세 선수들은 이역만리 타향에서 우리 교민들의 환영에 큰 감상에 젖어 모처럼 훈련의 피로를 풀기도 했다.

또 8월 8일 로스앤젤레스 KHJ 방송국에서는 올림픽에 참가한 세 선수들에 대해 기록 등을 소개하는 방송을 했는데 이들은 인터뷰를 하면서 일본말이 아닌 조선말로 방송을 하고 전경무가 영어 통역을 맡았다. 전경무는 광복이 된 뒤 올림픽대책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아 1947년 5월 29일 스웨덴 스톡홀름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미군용기 편으로 출발했으나 일본 도쿄 인근 야산에서 추락하는 바람에 참사를 당한 인물이다.

로스앤젤레스 방송국의 특별 방송은 올림픽에 참가하는 선수들에 대한 특혜 가운데 하나이기는 했지만 이는 우리 교민들이 방송국에 특별 교섭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였으며 불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교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출전한 올림픽 마라톤에서 김은배가 당당 6위에 입상하자 교민들뿐만 아니라 조선에서도 큰 흥분에 휩싸였다. 어쩔 수없이 일장기를 달고 출전을 했지만 세계에서 가장 큰 스포츠 경연장인 올림픽에서, 더구나 올림픽의 꽃이나 다름없는 마라톤에서 6위에 입상한 것은 조선인의 의기를 세계에 널리 떨친 쾌거나 다름없었다.

이를 동아일보는 “국제적 무대에 영향을 끼친 우리 마라톤의 의기”라며 이제 우리 마라톤은 완전히 국제적으로 진출하게 되었다고 보도하면서 “김군이 절대로 앞서지 말라고 한 츠다의 작전에 응하지 않고 가지런히 뛰다가 최후 몇 마일에 스피드를 냈더라면 응당 더 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는 세간의 평을 싣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우리 조선으로 하여금 마라톤 왕국을 세울 때는 지금이라고 강조했다.

김은배의 아버지 김수환은 “6등을 하였다는 것을 방금 라디오로 들었습니다. 6착 까지 점수를 얻는다지요. 그러면 면목이 서게 되었습니다그려. 내 아들이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오직 여러분의 성원과 애호하신 힘으로 믿습니다. 제 각기 이기려고 세계 각국에서 나온 선수들 틈에서 제집 어린 것이 그렇듯 여섯째를 했다니 꿈인지 생시인지 그저 감격할 뿐입니다.”라며 기뻐했다.

또 김은배를 발굴했던 양정고보 체육교사 미네기시쇼타로(峯岸昌太郞)도 “이제는 죽어도 원이 없을 만치 그저 기쁩니다. 이런 선수를 조선에서 조선 사람으로 길러내게 된 것은 조선체육계를 위하여 또 장래를 위하여 큰 센세이션을 일으킨 점에서 김군의 활약은 실로 감격할 뿐이외다. 나라로 18개국 지지 않으려는 28명의 노장 숙장들에 끼여 생후 처음 국제무대에서 당당히 싸워 나라 수로 15개국, 22명의 선수들을 자기 밑으로 떨어뜨린 것만으로 나는 우승에 못하지 않은 기쁨에 날뜁니다.”라고 말했다.

[정태화 마니아리포트 기자/cth082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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