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前 시카고 컵스 유망주 정수민의 '미국 야구 이야기'

힘겨운 마이너리그 시절 마감하고 지난해 귀국 선택.

2014-11-11 22:32

▲귀국이후현역복무에임한정수민.그는현재22사단행정병으로근무중이다.사진│김현희기자
▲귀국이후현역복무에임한정수민.그는현재22사단행정병으로근무중이다.사진│김현희기자
[마니아리포트 김현희 기자]](전편에서 계속)부산고 시절, 故 조성옥 / 김민호 감독으로부터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정수민은 2008시즌을 마친 이후 태평양을 건널 수 있었다. 비록 모교 부산고는 황금사자기, 대통령배, 청룡기, 봉황대기 등 이른바 ‘4대 메이저 대회’에서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했지만, 화랑대기 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던 성과까지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화랑대기 대회는 대통령배/봉황대기 대회 개최 이전까지만 해도 ‘고교야구 3대 대회(청룡기, 황금사자기, 화랑대기)’중 하나로 여겨질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는 팀 동료 안태경(롯데), 오수호(SK) 등과 함께 연고지 롯데의 1차 지명 후보로 언급이 됐던 유망주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수민은 안정된 국내 생활을 뒤로하고 과감하게 도전을 선택했다. 계약 조건도 안태경에 비해 그다지 나은 것도 아니었지만, 그는 주저하지 않고 계약서에 서명했다. 당시를 떠올린 정수민은 “2학년 때부터 시카고 컵스에서 나를 주목하기 시작했다고 하더라. 그런데 내가 계약에 이르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불펜 피칭에서부터 시작됐다. 하루는 시카고 컵스 관계자가 나를 포함하여 또 다른 동기의 피칭을 보러 왔는데, 내가 던지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하더라. 그 당시 최상의 컨디션으로 피칭에 임했던 것이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았나 싶다.”라며 계약서에 서명한 사연을 밝히기도 했다.

'현역 병장' 정수민이 들려 준 미국 생활, 그리고 마이너리그

하지만, 단신으로 미국 땅을 밟은 정수민은 곧바로 ‘적응’이라는 문제에 직면해야 했다. 영어도 익혀야 했고, 마이너리거라면 피할 수 없는 ‘장거리 버스 이동’에도 익숙해져야 했다. 그러나 메이저리그를 노리는 이들은 대부분 이러한 과정을 거쳐 스타가 됐다. 정수민 본인도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묵묵히 인고의 세월을 견뎌야 했다.

“한 번은 일리노이주에서 캐나다 밴쿠버까지 버스로 이동한 일이 있었다. 버스로만 12시간 걸리는 대장정이었다. 원정지에 도착하면, 4시간 휴식이 주어지는데 이 공백 시간에 시차 적응을 해야 한다. 같은 미국 땅인데 말이다(웃음). 그것을 몸으로 체험하고 나니, ‘아, 메이저리그에 아무나 올라가는 것이 아니구나!’를 여실히 느꼈다.” 정수민의 회상이다. 하지만, 고생에 대한 결과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로우 싱글 A에서 3점대 평균 자책점(27과 2/3이닝 소화, 평균자책점 3.90)을 기록하면서 서서히 자신의 기량을 끌어올렸기 때문이었다. 특히, ‘미소 천사’라는 별명에 걸맞게 낙천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던 것도 미국 생활을 버티게 해 주었던 큰 원동력이 됐다.

“사실 컵스에 나 외에도 한국인 선수들이 많았다. 후에 입단한 나경민, 김진영 외에도 지금은 템파베이로 이적한 이학주 등이 그랬다. 동양계 선수뿐만이 아니라, 스패니쉬계 선수들도 많아 이른바 ‘다국적’ 구단이었다. 그래서 미국 본토에서 태어난 선수들도 선입견 없이 다가와 줬고, 영어를 비롯하여 각종 야구 노하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적응도 빨리 됐다.” 그래서인지 정수민은 쓰기를 제외한 영어 읽기와 말하기에는 별다른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고 한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정수민이 ‘야구’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여건이 만들어진 계기가 되기도 했다. 정말 그대로 성적만 낼 경우, 상위 리그 진출도 어렵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미국 진출 3년차였던 2011년, 정수민의 야구 인생에 첫 번째 위기가 찾아왔다.

“어깨 부상이었다. 시즌을 앞두고 어깨가 아파 잠시 쉬었는데, 쉬다가 다시 연습 피칭을 하다 보니 내 원래 폼이 바뀌어 있었다. 그래서 제대로 공을 던질 수 없었고, 그렇다고 1:1로 도와 줄 이도 없어서 그대로 1년을 재활에 매달려야 했다. 하지만, 재활 이후 성적은 나쁘지 않았다. 그 다음 해(2012년)에는 잘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경기를 하다 보니 또 다시 투구 폼이 무너졌고, 어깨 부상이 재발했다.” 덤덤하게 당시를 떠올린 정수민은 2013년을 앞두고 자신의 앞날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방황에 빠질 법했지만, 그 시간은 생각보다 길지 않았다.

▲2011년재활이후부산고-경남고라이벌전에서모습을드러냈던정수민(사진좌).정수민우측에서있는이가안태경이다.사진│김현희기자
▲2011년재활이후부산고-경남고라이벌전에서모습을드러냈던정수민(사진좌).정수민우측에서있는이가안태경이다.사진│김현희기자
“부상당한 유망주를 기다려 줄 리가 없다는 생각에 그때부터 방출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2013년 3월 24일에 구단으로부터 방출 통보를 받았다. 그런데 나의 방출 소식을 접한 타 구단들로부터 여러 차례 트라이아웃 제의를 받았다. 그 중에는 일본 구단도 있었다. 귀국과 도전 사이에서 고민했지만, 나의 선택은 귀국이었다.” 정수민의 회상이다. 타 구단으로부터의 영입 제의가 많았던 만큼 또 다시 도전을 선택할 만했지만, 그의 귀국 결심에 쐐기를 박은 것은 ‘가족’과 ‘군대’, 두 가지 때문이었다.

“어머니도 그러하셨지만, 특히 할머니께서 내가 돌아오기를 바라고 계셨다. 여기에 군 문제도 빨리 해결하자는 마음에 방출 통보를 받은 지 3일 만에 주저 없이 귀국을 선택했다. 이후 병무청에 바로 재검과 함께 자원입대 신청서를 냈다.”

보통 정수민과 같이 부상 경력이 있는 선수들의 경우, 공익 근무 판정을 받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었다. 안태경처럼 이렇다 할 부상 경력이 없는 경우에 한해서만 현역 판정이 나올 뿐, 정수민 역시 고향 부산에서 공익 근무에 임했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신분은 육군 현역병, 근무지 역시 강원도 최전방인 22사단이었다.

- 3편, ‘내년 2차 신인지명 회의 지명을 기다리는 정수민’에서 계속 -

[eugenephil@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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