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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스포츠 100년](62)민족체육으로 새 출발한 대한체육회②7년만에 재건된 조선체육회

2021-02-13 07:55

1945년 8월 16일 휘문고보 군중 속의 몽양 여운형의 모습. 여운형은 광복된 조선체육회의 초대 회장으로 취임했다.[사진출처 몽양여운형기념사업회]
1945년 8월 16일 휘문고보 군중 속의 몽양 여운형의 모습. 여운형은 광복된 조선체육회의 초대 회장으로 취임했다.[사진출처 몽양여운형기념사업회]
7년 만에 재건된 조선체육회…광복 후 초대 회장 여운형
자유해방경축 전국종합경기대회를 성공리에 개최한 조선체육동지회는 조선체육회 재건을 위한 작업에 본격적으로 돌입했다.

1945년 11월 26일 YMCA에서 조선체육동지회 제1차 평의원회의가 개최돼 헌장을 제정하고 새 임원을 선출했다. 7년 만에 조선체육회의 재건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평의원회의에서는 여운형이 회장으로 추대돼 조선체육회 회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11대 집행부의 진용은 다음과 같다.

△회장=여운형 △부회장=신국권 유억겸 △이사장=이병학 △상무이사=김영구 이길용 이문호 이종구 장일홍 조영하 △이사=김신실 김용구 김용식 김은배 김정학 서상국 이상백 이성구 이영민 이운용 이윤용 조병학

회장으로 선출된 여운형은 일찍부터 스포츠를 좋아해 청년시절에는 체조 모델을 할 정도였다. 여운형이 체육 행정에 참여하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33년 5월, 제11회 조선체육회 정기총회에서 이사로 선출된 것이 시작이었다. 당시 여운형은 전형위원을 맡아 회장에 윤치호, 부회장에 유억겸을 선출하고 송진우 김성수 백관수 주요한 등 민족진영 인사들을 이사로 참여시키는 데 구심점 역할을 했다.


여운형은 체육을 단순한 체육이 아닌 민족체육의 관점에서 접근했고 그러기에 체육을 통한 독립운동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손기정의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우고 보도한 조선중앙일보 1936년 8월 13일자 지면, 조선중앙일보 캡쳐]
손기정의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우고 보도한 조선중앙일보 1936년 8월 13일자 지면, 조선중앙일보 캡쳐]
손기정이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했을 때 그는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 재임 중이었다. 당시 동아일보는 손기정 가슴의 일장기를 지우고 신문을 발행해 정간처분을 받았는데 조선중앙일보는 동아일보보다 10일 먼저 일장기 말소 사진을 내보냈다. 그대로 묻히는가 했던 이 일은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문제가 커지면서 조선중앙일보까지 확대돼 결국 여운형은 사장직에서 물러나고 조선중앙일보는 폐간되고 말았다.

여운형을 재건된 조선체육회 초대 회장에 적극 추천한 이는 이상백이다. 두 사람은 광복 전인 1944년 여운형이 조직한 비밀결사인 조선건국동맹에 이상백이 가입해 기획처의 간부로 일하면서 의기투합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운형의 체육에 대한 신념과 민족의식에 공감한 이상백이 그를 조선체육회 회장으로 밀었다는 것이다.


부회장으로 추대된 신국권은 1932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에 중국 축구 대표선수로 출전했던 신기준이며 유억겸은 미 군정청 문교부장으로 재임 중이었다. 이사장인 이병학은 광복 전 보성전문 교수를 지낸 인물이다.

조선체육회 재건을 전후해 각종 경기단체들도 창립러시를 이루었다.

조선축구협회는 9월에 재건돼 10월 전조선축구대회를 개최했고 10월에는 조선정구협회(회장 황명원), 조선농구협회(회장대행 이성구) 조선유도연맹(회장 이범석)이 잇달아 설립됐다. 조선농구협회는 창립총회에서 김영구를 회장으로, 이성구를 이사장으로 선출할 예정이었으나 김영구가 미 군정청 체육과장으로 재직하고 있어 회장 선출을 유보하는 대신 이성구 이사장이 회장 직을 대행하는 체제로 출범했다.

1946년 제1회 전조선아마권투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선수들.
1946년 제1회 전조선아마권투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선수들.
11월에는 조선아마추어권투연맹(회장 안동원), 12월에는 조선빙상경기연맹(회장 최도용), 조선역도연맹(회장 이병학), 조선승마협회(회장 유동열)의 창설이 이어졌고 조선학생육상경기연맹과 조선학생경기연맹도 결성됐다.

경기단체 창설은 이듬해에도 이어져 조선궁도협회(회장 임창번), 조선럭비축구협회(회장 김재선), 조선아마추어레슬링연맹(회장 김동인), 조선수상경기협회(회장 조영하), 조선야구협회(회장 서상국), 조선배구협회(회장 조동식) 조선스키협회(회장 권영대), 조선승마협회(회장 유동열), 조선연식야구연맹(회장 최선익) 조선자전거경기연맹(회장 민원식)이 차례로 현판을 내걸었다. 1947년에도 조선펜싱연맹(회장 윤치영), 조선여자체육연맹(회장 조동식), 조선하키협회(회장 정일형), 여자정구협회(회장 김복림)가 출범했다.

또한 이들 경기단체가 주최하는 대회도 줄을 이었다. 조선농구협회는 1946년 2월 기청체육관에서 광복 후 첫 대회인 제1회 여자농구연맹전을 열었다. 이 대회에는 여중부에 경기고녀, 경성여상, 이화고녀, 숙명고녀, 진명고녀, 동덕고녀, 무학고녀, 일반부에 숙명여자구락부, 이화여대, 여자사범 등이 참가해 성황을 이뤘다. 경성실업연맹이 주최하는 실업농구연맹전도 뒤이어 열렸다.

조선배구협회는 1946년 4월 13일과 14일 이틀 동안 경성고녀 코트에서 제1회 춘계여자중등배구리그전을 개최했다. 조선배구협회는 이어 5월에 제1회 춘계 남자중등 및 대학, 여자일반연맹전을 열고 6월에는 서울운동장에서 제1회 종별선수권대회를 개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탁구와 씨름도 각각 종합탁구선수권대회와 전국씨름대회를 출범시켰고 11월에는 서울운동장에서 제1회 전국축구선수권대회가 열려 결승전에서 인천조일양조가 상과대학을 6-2로 누르고 첫 우승을 차지했다. 소년체육협회도 이 해에 소년소녀육상대회와 초등야구대회를 개최했다.

경기규칙을 한글로 펴내는 작업도 병행됐다. 조선농구협회는 1946년 8월 한글로 된 최초의 농구 규칙서를 발간했다. 이듬해 9월에는 조선야구협회가 한글 규칙서를 펴냈다. 최상준이 ‘문교부체육과추천 야구규칙’이라는 이름으로 출간한 이 규칙서의 가격은 1백 원이었다.

[정태화 마니아타임즈 기자/cth082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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