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대한민국 스포츠 100년](41)마라톤이야기③'마라톤 왕' 김은배 등장(상)

1931년 2시간30분벽 돌파하는 세계신기록 세워---1920년 앤트워프올림픽 콜레마이넨 세계기록 5분이상 단축해

2020-10-23 07:00

1913년 8월 21일 서울에서 출생한 김은배는 1929년 3월 경신학교에서 양정고보 2학년으로 전학을 하면서 일본인 체육교사 미네기시쇼타로(峯岸昌太郞)의 지도를 받으면서 급성장했다.

1931년 마라톤 세계기록을 수립한 김은배
1931년 마라톤 세계기록을 수립한 김은배
양정의 교모를 쓰자말자 출전한 제6회 전조선육상경기대회(조선체육회 주최) 1500m에서 4분38초2로 우승하고 1만m에서 3위에 올랐다. 그리고 10월 조선체육협회 주최 조선신궁대회 1만m에서 준우승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당시 육상경기는 나이나 학년에 구별없이 성인과 학생들이 똑같이 출전해 기량을 겨루던 시기였다. 따라서 이제 갓 15살을 벗어난 소년의 몸으로 성인과 겨뤄도 전혀 손색이 없는 실력을 보인 김은배는 단연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 내릴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이렇게 1929년과 1930년에 걸쳐 중거리와 장거리에서 뛰어난 경기력을 보인 김은배는 1931년 1월 일본육상경기연맹이 새해 첫 사업으로 벌인 오사카~고베 역전경주대회에 출전해 발군의 기량을 선보였다.

이 대회는 양정고보가 3연패에 도전하는 중요한 경기였다. 팀의 최종 주자로 나온 김은배가 배턴을 이어 받았을 때 양정은 일본의 우수선수들은 총망라했다는 간사이 중학에 약 110m 뒤쳐진 2위였다. 그러나 마지막 스퍼트를 한 김은배는 조금씩 거리를 좁히기 시작한 뒤 결국 선두로 나서는 극적인 장면을 연출해 양정고보가 전설적인 3연패 금자탑을 쌓을 수 있었다.

마라톤 기록단축도 바로 김은배 몫이었다. 1931년 10월 18일 제7회 조선신궁경기대회 마라톤이 열렸다. 500m인 경성운동장을 두 바퀴 돌고 황금정을 통과해 경인가도의 영등포를 거쳐 수원 가도 중간쯤에서 되돌아오는 26마일 4분의 1코스였다.

2시간26분12초. 동아일보가 ‘조선이 낳은 천재적 선수’라고 칭찬하며 호외를 발행한 경이적인 기록이었다. 이는 1927년 조선인 최초 마라톤기록으로 마봉옥이 세운 3시간29분37초, 그리고 이듬해인 1929년 백마구락부 이성근의 2시간36분50초의 조선최고기록을 10분38초, 일본 최고기록(2시간35분24초)을 9분12초, 그리고 1920년 앤트워프 올림픽에서 핀란드 한네스 콜레마이넨의 세계최고기록(2시간32분5초38)을 5분53초38이나 앞당긴 세계최고기록이었다.

그리고 조선에서 종래 불규칙한 마라톤 거리를 국제적으로 통일 해 1927년에 풀·마라톤이 시작한 뒤 5년 만에 무려 1시간3분22초의 놀라운 기록 단축을 시킨 경이적인 기록이었다. 하지만 이 기록은 일제가 스스로 공인을 해 놓고도 이런 저런 이유로 공인코스가 아니라며 비공인세계기록으로 남고 말았다.

김은배가 마라톤에서 세계공인기록을 돌파했다고 보도한 당시 동아일보 지면(1931년 10월 29일자 7면]
김은배가 마라톤에서 세계공인기록을 돌파했다고 보도한 당시 동아일보 지면(1931년 10월 29일자 7면]


김은배가 세계기록을 세운 이틀 뒤인 10월 20일 동아일보는 1면 머리에 ‘세계기록 돌파 조선의 자랑’이란 제목으로 사설을 실었다.

시내 양정고보에 학적을 둔 김은배는 지난 18일 일반 마라톤 경기에서 2시간2612초의 기록으로 세계적 기록인 핀란드의 콜레마이넨의 2시간3253854738(55338의 잘못인 듯)을 돌파하는 세계적 신기록을 세웠다. 이는 조선인이 세운 세계적 기록의 효시로서 홀로 김군의 영예일뿐 아니라 널리 조선인 전체의 자랑이라 아니할 수 없다. 특히 김군은 방금 18세의 중학생으로서 김군은 아직 체력의 완전한 발달을 못 본 자이니 그의 장함은 타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정태화 마니아리포트 기자/cth0826@naver.com]
<저작권자 © 마니아타임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쇼!이슈

마니아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