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대한민국 스포츠 100년](27)일제 강점기의 지방체육 ① 야구로 꽃핀 인천

2020-05-25 12:33

마치 로마의 원형경기장을 연상케하는 인천 체육의 중심이 되었던 웃터골운동장, 지금은 제물포고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마치 로마의 원형경기장을 연상케하는 인천 체육의 중심이 되었던 웃터골운동장, 지금은 제물포고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인천을 중심으로 발전한 경기체육
제물포(현 인천)는 1876년 강화도조약과 1882년 제물포조약이 체결된 뒤 외국 문물을 받아들이는 개항장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를 이룬 곳이다. 1882년 8월 영국 군함 ‘플라잉 피스’호의 수병들이 제물포에 상륙해 축구경기를 한 뒤 돌아가면서 공을 선물한 것이 우리나라 축구 전래의 기원이듯이 각종 신식문물들이 제물포를 통해 들어왔고 이곳에서 첫 선을 보였다.

사실 조선 말기까지 경기도의 중심은 인천이 아닌 수원이었다. 호남에서, 충청에서, 그리고 영남에서 한양에 오기 위해서는 수원을 거쳐야 했다. 이렇듯 수원은 고종 33년 1896년 경기도 도청소재지였으나 1897년 3월 22일 미국의 지원을 받은 경성과 인천을 잇는 경인선 철도가 개통되고 제물포항을 중심으로 서구 열강들의 신식문물들이 들어오면서 인천이 사실상 경기도의 중심역할을 하게 되었다.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1899년 인천영어야학회(현 인천고 전신) 1학년인 일본인 학생 후지야마 후지사와는 2월 3일 자 일기에서 베이스볼이라는 서양식 공치기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황성기독교청년회 미국인 선교사인 질레트가 1904년에 야구를 소개했다는 기록보다 무려 6년이 앞서고 있다.

인천에서 야구가 성행된 연유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영화학교와 이길용 교사에 얽힌 이야기로 영화학교 학생이던 최영업이 1955년 9월 26일 주간인천에 ‘야구 인천의 걸음마 시작은 이길용 씨의 공로’라는 회고기의 일부이다. 이길용은 바로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인 손기성의 가슴에 붙은 일장기를 지운 동아일보 기자로 이때는 동아일보에 입사하기 전으로 보인다.


“내 나이 14살로 영화소학교 4학년 때 체조시간이면 ‘찜뿌’와 같은 형식으로 야구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야구 도구는 모두 자제 자급이고 볼은 배재를 졸업하고 영화학교 선생으로 잠시 있으면서 우리 편 매니저 역할을 하던 이길용 선생이 서울서 얻어다 준 것으로 9인 1단이 제법 연습을 쌓았는데 한번 전수팀에 도전해 볼 기회까지 그 실력이 괄목 발전하였다. 하루는 이길용 선생이 일요일에 시합을 하기로 했다고 해 설레는 마음으로 웃터골 향기 그윽한 오동나무 밑으로 입장을 했으나 그때 스파이크, 스타킹, 운동모는 말할 것도 없고 운동복 한 벌 제대로 입은 사람이 없었다. 그 때 전수편에서는 한일인 첫 시합이라 대단한 호기로 나섰는데 그때 매니저 이길용 씨가 보무도 당당히 나가 저쪽 책임자인 일인 선생에게 가서 일본으로 주문한 도구 일식이 아직 오지를 않아 오늘 시합은 중지할까 하다가 인사 삼아 그냥 나왔으니 다음 공일로 연기하자고 말했다. 물론 엉뚱한 술책이요, 터무니없는 책전이었다. 이를 듣고 난 일인 선생은 걱정하지마라, 도구 일체를 빌려 줄 테니 자웅을 결해보자고 해 시합을 했는데 점수는 기억나지 않고 10대 몇으로 참패를 당했다. 이런 배짱과 대담무쌍한 지략을 겸비한 이길용 씨 덕분에 이것이 동기가 되어 미우단, 은행단, 동지구락부, 철도팀 미가등, 인중라이온스, 상업전문, 실업단, 103 은행단 등 인천에 속속 일본인 야구팀이 속속 등장하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급조된 영화학교 팀이 인천 야구팀의 효시라고 하기에는 어렵다. 정식 야구팀이라기보다 ‘찜뿌’였고 일본인학교 전수학교에서는 정식야구팀이 있었기 때문이다.

야구의 뿌리, 한용단 탄생

인천에서 처음으로 탄생한 한국인 야구팀은 한용단(漢勇團)이다. 한용단의 모체는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였다. 이 친목회는 1910년대부터 시작된 인천 학생들의 서울 기차 통학이 점점 늘어나자 통학생들 중의 최고 연장자인 곽상훈(전 국회의장)을 초대 회장으로 해서 결성된 말 그대로 친목단체다. 동아일보가 1920년 6월 13일자에서 경기기차통학생친목회가 한용단으로 바뀌었다고 보도하고 있다.

“인천 거주인의 경성통학생으로써 조직한 친목회에서 주장하야 인천청년으로 시대에 요구하는 정신적 체육과 실실적 체육을 유감 업시 수양발휘하기 위하야 일단체를 성립 하얏스니 명칭은 한용단이라. 단장은 곽상훈씨를 추천하얏스며 당국에 기부금 인허를 득하야 차를 모집할 터이며 유지 제씨의 찬조를 희망한다는 데 심능덕 장석우 임상윤 이혁로 제씨와 본사 지국장 하상훈씨의 찬조로 불원간 회관을 건립하고 도서도 비치하며 문예잡지도 발행하기로 목하 동단원은 열심 분투하는 중이라더라.”(동아일보 1920년 6월 13일 4면)

하지만 이보다 앞서 한용단이 각종 대회에 출전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실제로는 이보다 앞서 출범한 것으로 보인다. 동아일보의 보도에 앞서 한용단은 1920년 4월 18일 오전 11시 웃터골 운동장에서 배재 팀과의 역사적인 첫 경기에서 10-3으로 이겼으나 오후에 라이온스 팀과의 경기에서는 16-2로 참패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한용단은 1926년 고려야구단이란 새 이름으로 인천체육협회 주관 야구대회에 참가하기 까지 인천야구의 대들보 구실을 했다. 한용단에서 핵분열처럼 분산 발전한 것이 한용청년회, 제물포청년회, 인천청년회, 인천소년회, 기봉단, 보이스카우트였다. 한용단 멤버들은 배재, 중앙, 휘문 등의 서울의 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중심이었고 최소한 6개월 이상 인천에서 거주해야 한다는 규정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한용단에서 고려야구단으로 맥을 이은 인천야구는 인천공립보통학교(창영초등학교 전신), 영화보통학교(영화초등학교 전신)의 야구부 활동으로 이어지는 밑거름이 됐다.

[정자건 마니아리포트 기자/news@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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