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스포츠 100년](5)조선체육회와 조선체육협회는 불가근불가원의 관계

정태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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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0-02-23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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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체육회 창립 10주년 제10회 전조선종합체육대회 야구경기 모습(1929년 6월 경성운동장)
순수한 조선인들만의 체육단체인 조선체육회와 조선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조선체육협회는 가까이 할 수도 멀리 할수도 없는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관계였다.

근대화와 함께 근대 스포츠들이 조선에 보급되면서 여러 체육단체들이 태어나고 또 사라졌지만 일제 강점기에 가장 대표적인 체육단체가 바로 조선체육회와 조선체육협회였다. 조선체육협회는 조선체육회보다 1년 앞선 1919년 2월 18일에 창립됐다. 3·1 독립운동이 일어나기 불과 보름전이다. 그리고 1년 하고도 5개월이 지난 1920년 7월 13일 조선체육회가 고고성을 울렸다.

조선체육협회는 1911년 7월에 창설된 일본체육협회를 모델로 1918년 가을에 결성된 경성정구회와 1919년 1월에 만들어진 경성야구협회를 통합한 형태로 발족했다. 즉 조선체육협회는 "조선에서의 체육을 장려한다"는 목적을 명시했지만 사실은 일본에 의해 주도된 조선체육계를 총괄하는 단체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물론 출범 당시에는 민간단체였지만 실제로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곧 변질이 되면서 일본체육협회의 조선지부 역할을 담당했다.

이와 달리 조선체육회는 3·1 독립운동에 영향을 받은 일제가 무단정치를 문화정치로 전환된 틈을 타 도쿄유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순수 조선체육인들의 욕구에 의해 탄생됐다. 즉 일본인단체인 조선체육협회에 대항할 조선인단체의 필요성이 무엇보다 절실함을 깨달은 덕분이었다. 아마도 이 절심함에다 조선체육협회가 미리 출범하지 않았다면 조선체육회는 야구나 정구, 축구처럼 한 개 종목을 관장하는 단체로 만족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또한 이들 두 단체들은 출범 초기 언론사들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았다. 조선체육협회가 일본인이 경영하고 일본어로 발행하는 경성신문사의 후원을 받았다면 조선체육회는 1920년 4월 1일 민족지를 표방하고 창간한 동아일보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았다. 경기하는 시간이나 장소, 그리고 출전하는 학교나 팀, 그리고 우수선수들을 널리 알릴 필요가 있는 체육의 특성상 언론과의 공생관계가 되지 않으면 발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두 잘 알고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조선체육회와 조선체육협회는 이렇게 경쟁관계이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파트너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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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경성운동장 개장기념으로 열린 조선체육협회 주최 제1회 조선신궁대회 육상경기 모습
1925년 10월 경성운동장(현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자리)이 개장되면서 조선체육협회가 종합대회인 제1회 전조선신궁대회를 개최하는 동안 조선체육회는 제6회 전조선야구대회를 개최해 맞불을 놓아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지만 현실적으로 조선체육협회가 주최하는 대회에 조선선수들이나 조선학교들이 출전하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무엇보다 돈도 문제가 됐다. 회원들의 회비와 대회를 주최해 얻는 수입만으로 간신히 꾸려가고 있는 조선체육회로서는 다양한 종목 대회를 개최할 여유가 없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체육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육상만하더라도 조선체육협회는 1920년 5월에 첫 춘계육상경기회를 시작했지만 조선체육회는 그보다 4년이 늦은 1924년에야 간신히 제1회 전조선육상경기대회를 출범시켰다. 이마저도 예산부족으로 1926년과 1927년, 그리고 1931년에는 아예 개최하지도 못했다. 뿐만아니다. 정규 풀코스 마라톤도 조선체육협회는 1927년에 처음 시작했지만 조선체육회는 1932년 김은배가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마라톤에서 6위에 입상한 것을 계기로 1933년에야 겨우 시작했다.

이런 사례는 육상에 국한된 것 만은 아니었다. 배구, 농구에다 여자체육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체육회는 1938년 강제 해산될때까지 여성들을 위한 단일 대회는 단 한차례도 개최하지 못했다. 심지어 동아일보가 전조선여자정구대회를 창설할 때도 그저 옆에서 구경하는 정도에 그쳤다. 조선체육회에서 주최하는 대회에 여자선수들의 참가도 저조했다. 농구의 경우 중앙기독교청년회(YMCA)가 야간리그전까지 창설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체육회는 창립 15주년인 1934년에 들어서야 간신히 농구를 종목에 포함시켰고 조선체육협회는 1925년 제1회 조선신궁대회부터 배구와 농구를 실시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우리 선수들의 기량이 늘어나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을 압도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지게 되고 극동대회(현 아시안게임의 전신)나 올림픽 등 국제대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하면서 조선체육회는 조선체육협회의 존재 자체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현실적으로 조선체육협회를 통하지 않고는 조선인들이 각종 국제대회에 나갈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조선체육회는 은연중에 조선체육협회가 주최하는 대회에 조선인 선수들의 참여를 권유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1938년 일제의 강압에 의해 조선에 똑 같은 역할을 하는 체육단체가 두 개가 필요없다는 논리에 따라 조선체육회가 조선체육협회에 강제 통합되었고 그 뒤 조선체육협회도 일제가 중국과 동남아로 전쟁을 확대하면서 그 존재가치가 사라져 역사 속으로 사라져 완전히 맥이 끊어져 버렸다. 비록 조선체육협회가 역사의 뒤안길로 완전히 사라져 버렸지만 이 또한 조선에서 시작되고 조선에서 마감한 조선체육의 한 부분이다. 하지만 조선체육협회에 대한 연구는 턱없이 부족한 것 같다. 경기뿐만 아니라 협회의 운영등에서 알려진 바가 거의 없어 유감스럽다.

반면 조선체육회는 조선인들의 가슴에 체육에 대한 열정을 심어주고 19년이라는 짧은 기간을 마감했지만 1945년 광복과 함께 부활, 이제 한 세기의 역사를 맞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 강점기의 조선체육에 대한 연구도 아직은 미완성으로 보인다.

대한체육회 창립 100주년을 맞아 대한체육회가 야심차게 마련한 '대한민국 체육 100년' 역사 편찬에 필자도 광복 이전의 우리나라 체육을 맡아 참여하고 있지만 이는 조선체육회의 주최 대회를 중심으로 한 조선체육의 일부분일 뿐이다. 나머지는 거의 겉햝기에 그치고 있다. 그 못다한 나머지 부분은 이제 체육사학자들이 채워 주어야 할 몫으로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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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화 마니아리포트 편집인/cth082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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