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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현진, 조성민, 박찬호, 최동원- 전 한화 사장의 회고

2022-02-01 06:52

괴물 류현진, 우리는 그를 핏뎅이라고 불렀다

류현진, 조성민, 박찬호, 최동원- 전 한화 사장의 회고
2019년 12월 4년 총액 8천만달러의 연봉으로 토론토 블루 제이스로 간 류현진의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이야기다.

홈 경기가 끝난 뒤 구장 사무실에서 남은 일을 마저 보고 나서는 길에 그와 마주쳤다. 가볍게 1승을 추가한 날이었다.

“어서 가서 쉬지 않고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니?”

“형들이 아이스크림 사 오래요.”하며 룰루랄라 뛰어가는 걔는 영락없는 철부지 소년이었다.

2006년 한화 이글스에 입단한 해 한국 프로 야구 사상 처음으로 신인왕과 MVP를 함께 거머쥐었고 그해 한화의 한국 시리즈에서 준우승을 이끈 그는 최고의 스타였다.

그러나 스타는 개뿔(?), 선배들의 잔심부름을 군말 없이 하는 비슷한 장면을 그 후 경기장, 숙소 주변에서 여러 차례 보았다.

‘괴물’이란 별명은 매스컴이 붙여 준 거였고 우리들은 그를 ‘핏뎅이’라 불렀다.

2004년 어느 때인가부터 될성부른 싹 찾아내는 데 눈이 밝던 구단의 스카우트 팀장은 “인천 동산고에 물건이 하나 있는데 …”를 여러 차례 되뇌었다.

수소문해보니 “팔은 한 번 수술했는데 괜찮을 거 같긴 한데…” “글쎄 아무래도 팔이…” “너무 뚱뚱해서(류뚱이라는 별명, 소년가장이란 별명도 후에 추가 됐지만)”

의견들은 좀 달랐는데 감독 등 전문가들의 결론은 ‘잡아야 할 물건’ 이었다. 문제는 지역 연고 팀 우선 지명과 전년도 성적 역순으로 선수를 지명하는 당시 제도상 우리 차례가 세 번째라는 것이었다.

아무튼 2005년 8월 열린 2006년 신인 2차 지명에서 앞의 두 팀이 그를 선택하지 않았고 류현진은 우리에게 ‘곱게’ 넘어왔다. 그 과정은 모두 생략한다(영업비밀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낭보를 전하는 현장 스카우트 팀장의 목소리는 귀에서 전화기를 떼야 할 정도였다.

첫 만남

2005년 9월 인천 공항 근처 한 호텔. 인천에서 개최된 아시아 청소년 선수권 대회 결승전에서 한 점 차로 일본에 져 준우승한 한국 대표팀 해단식 겸 축하연이 열렸다.

한 달 전 우리 식구가 된 류현진을 보러 그곳에 갔다. 멀리 떨어져 앉았지만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를 불렀다.

“나 누군지 모르지?”

“네…”

“한화 이글스 사장”

“아!”

“반갑다. 우리 이제 한식구 됐네.”

수줍어하고 쑥스러워하는 그를 한번 안아 보았다. 등판이 고목 나무 등걸을 아름 재는 것 같았다. 돌덩이같이 강했다. ‘핏뎅이’는 그 후 7년 동안 무럭무럭 자랐다. 2012년 구단에 포스팅 금액 2천6백만달러(약 280억원)라는 통 큰 선물을 남기고 2013년 ‘큰 물’로 뛰어들었다.

아우라가 대단했던 조성민

류현진, 조성민, 박찬호, 최동원- 전 한화 사장의 회고
나카사키로 구단이 마무리 훈련을 갔을 때 그곳 현의 환영 행사가 열렸다. 시내에서 떨어진 한적한 숙소 로비에 젊은 일본 여자 둘이 서성거렸다. 필시 구단 때문에 온 것 같아 알아보니 2005년 한화 이글스에 신고 선수로 입단했던 조성민의 일본 팬이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 때부터의 팬으로 떠난 지 몇 년이 지났는데도 그의 스케줄을 꿰뚫고 있었다. 나가사키에 훈련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휴가를 내서 온 것이었다.

숙소로 무작정 찾아와 조성민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마침 방에 있던 조성민을 내려오라고 불렀고 나는 멀찍이 빠졌다.

팬들은 수줍음 반, 반가움 반으로 가져 온 선물 보따리를 그에게 안겼다. 조성민은 고마운 마음을 익숙하게 나누며 사진도 찍고 했다. 두 팬은 2~3일동안 훈련장까지 찾아와 그가 피칭하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했다.

조성민은 외모 때문인지 체격 때문인지 문자 그대로 ‘아우라’가 대단했다. 멀리서도 후광이 보이듯 훤했다. 하와이 전지 훈련지에서는 선수단이 드나드는 시간에 호텔 로비로 그를 보려는 관광객들이 모였다.

한물간 지 꽤 지난 때였지만 인기는 대단했다. 그는 2년여를 더 있다 구단을 떠났다.

그러다 홀연히 갔다. 자신의 아우라가 너무 세 거기에 빨려 들어간것이려니 하며 추모할 수 밖에.

최다승 아시아 투수 박찬호

류현진, 조성민, 박찬호, 최동원- 전 한화 사장의 회고
2009년 봄 하와이 전지훈련. 내가 거기를 따라간 것은 숨은 목적이 있었다. 당시 필라델피아 소속 선수였던 박찬호가 며칠 우리와 함께 훈련하겠다고 요청했고 OK한 후 거기서 한번 보자고 연락했다.

음식 솜씨가 뛰어난 부인이 소개했다는 트럼프 호텔 뒷골목 일본 식당 방에서 그와 단둘이 앉았다. 간 보지 않고 돌직구를 꽂았다.

“고향 팀으로 와서 마무리를 장식해라.”

투 머치 토커인 그도 그 순간만은 의외로 심플했다.

“나도 같은 생각이에요. 그러나 내겐 이루어야 할 꿈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메이저리그 아시아인 최다승 기록을 남기고 싶어요. 그 후에 가겠습니다.”

고향팀 대 메이저리그 대기록의 대결은 더 겨뤄 보았자 싱겁게 끝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2010년 9월13일 메이저리그 통산 123승을 달성해 일본의 노모 히데오가갖고 있던 기록에 타이를 이루었다.

그리고 피츠버그 파이리츠 소속이었던 2010년 10월 2일 선 라이프 스타디움에서 열린 플로리다 말린스와의 경기 두 번째 투수로 등판, 3이닝을 무실점으로 던져 승리 투수가 되었다.

124승 98패, 그가 꿈꾸던 아시아인 최다승 기록이었다. 그는 약속대로2011년 말 고향 품에 안겼고 1년을 더 뛴 후 은퇴했다.

늘 "다 나았다"며 빙긋 웃던 최동원 감독

류현진, 조성민, 박찬호, 최동원- 전 한화 사장의 회고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혼자 4승을 따내며 롯데를 기적적으로 우승 시킨 불세출의 영웅 최동원도 우리와 몇 년(2005년~2008년)을 함께 했다.

그는 세밀하게 후배들을 가르쳤다. 그러다가 2007년 큰 수술을 받았다. 힘든 투병 생활을 잘 견뎌 냈다. 더 쉬라고 얘기해도 “괜찮다. 다 나았다”며 빙긋 웃었다.

그의 강한 특유의 프라이드가 병마 속에서 한순간도 흐트러지지 않고 버티게 해 준 힘 같았다.

구단은 그에게 2군 감독직을 맡겼다. 지도자로서의 운이 거기까지였던 그는 몇 년 뒤 세상을 떠났다. ‘최동원감독’이라는 칭호를 갖고 가도록 했다는 것이 구단에게는 그나마 위안이었다.

[이신재 마니아타임즈 기자/20manc@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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