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약 이번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이 어설프게 32강에 오르고 꾸역꾸역 16강 진출에 성공했다면 어땠을까. 상상만 해도 끔찍한 평행우주다. 축구협회 수뇌부들은 기다렸다는 듯 결과로 증명하지 않았느냐라며 떵떵거렸을 것이고, 감독 선임 과정에서의 불투명성과 밀실 행정, 온갖 위법 행위들은 성적이라는 달콤한 마취제에 묻혀 면죄부를 받았을 것이다. 시스템이 완전히 붕괴된 상태에서 선수들의 개인 기량에만 의존하는 시한부 축구는 결국 한국 축구를 더 깊은 파멸의 늪으로 인도했을 것이 자명하다. 어설픈 성공이 오히려 조직을 망가뜨리는 최악의 독약이 될 뻔한 순간, 참사라는 이름의 백신이 한국 축구의 숨통을 틔운 셈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웃 동네인 프로야구(KBO)의 구조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야구나 축구나 대한민국을 쥐락펴락하는 초대형 대기업의 자본 없이는 판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는 본질은 같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독점이냐 상호 견제냐의 거버넌스 구조에 있었다. 축구협회는 단 하나의 가문이 절대 권력을 쥐고 흔들었다. 견제할 경쟁 기업이 없으니 협회장이 리스크를 키워도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는 오너 리스크의 사각지대였다. 반면 KBO 리그는 라이벌 대기업들이 바글바글하다. 어느 한 기업이 KBO를 사기업처럼 부리려 하면 다른 기업들이 눈에 불을 켜고 막아선다. 대기업 간의 상호 견제가 자연스러운 밸런스를 유도하고, 돈은 기업이 내되 행정은 전문 총재가 공정하게 하라는 분리 공식이 작동한다. 축구협회 역시 문체부 감사와 사법적 칼날을 피해 갈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다만 지적사항의 무게가 달랐다. KBO의 감사가 행정적 절차 정비 수준에 그쳤다면, 축구협회는 국가대표 감독 선임 절차 자체를 통째로 위반하는 등 조직의 의사결정 시스템이 완전히 파괴됐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역사는 늘 기묘하게 반복된다. 우리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당시, 네덜란드전 0-5 참패 직후 현지에서 차범근 감독을 중도 경질하는 전무후무한 잔혹사를 겪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 98년의 처절한 실패와 진통이 있었기에, 한국 축구는 이대로 가다간 안방 월드컵에서 망신당한다는 공포감을 가졌고, 4년 뒤 2002년 한일 월드컵의 4강 신화라는 기적을 쏘아 올릴 수 있었다. 비록 해외에서 심판 판정에 대한 의혹을 제기할지언정, 국내 축구계의 텃세를 깨고 외국인 감독에게 전권을 위임해 학연과 지연이 아닌 실력 위주의 세대교체를 단행한 대수술의 결과물이었다.
2026년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통증은 정확히 30년 만에 찾아온 새로운 신화를 위한 빌드업이다. 98년에는 협회가 권력으로 상황을 통제하며 임기응변으로 버텼다면, 지금은 눈을 부릅뜬 팬들이 주주로서 당당히 버티고 있다. 껍데기만 남은 카르텔이 완전히 해체되고 있는 지금, 개혁의 순도는 2002년보다 훨씬 높다.
이 역사적인 개혁의 순간마다 늘 발목을 잡는 유령이 있다. 바로 정부가 개입하면 FIFA가 회원 자격을 정지해 국제대회에서 퇴출당할 수 있다는 공포 마케팅이다. 국제 무대에서의 고립과 월드컵 출전 금지라는 페널티는 물론 무섭다. 그것이 가져올 후폭풍의 무게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그 징계가 무섭다고 여기서 칼을 거두어선 결코 안 된다. 징계가 두려워 썩어 문드러진 환부를 그대로 덮어두는 것은, 암세포가 온몸에 퍼져 숨이 넘어가고 있는 환자에게 수술 부작용이 무서우니 그냥 진통제나 맞고 버티자고 말하는 꼴이다. 그것은 개혁의 포기이자, 한국 축구의 자발적 사망선고에 불과하다. 더욱이 지금의 개혁은 FIFA가 금지하는 정치적 외압이 아니다. 설사 일시적인 고립을 감수하고서라도, 이번 기회에 낡은 체제를 완전히 부수고 나와야 한다. FIFA라는 이름 뒤에 숨어 호가호위하던 무능한 사람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일은 단연코 없어야 한다.
우리가 지금 분노 대신 환호해야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독점 체제의 사망선고를 마침내 이 참사가 해내기 때문이다. 돈의 힘으로 시스템을 누르던 시대는 끝났다. 이제 한국 축구는 특정 재벌의 시혜가 아닌, 후원을 다각화하고 마케팅 전문성을 키우는 진짜 자생력을 기를 수밖에 없는 환경에 강제로 진입했다. 그렇기에 다가올 2030년 월드컵이 미치도록 기대되는 것이다. 2030년이 되면 이강인을 필두로 한 유럽파 황금세대들이 20대 중후반이라는 축구 인생의 완벽한 전성기의 정점에 도달한다. 이 날카로운 무기들이 학연·지연 카르텔에 물든 지도자가 아닌, 선진 시스템과 세계적 전술을 갖춘 진짜 사령탑 밑에서 뛰게 될 때의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당장 집을 새로 짓는 기초공사 기간 동안은 성적이 안 나와 또다시 속이 터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수술실을 나와 회복실에서 겪어야 할 당연한 진통이다. 1998년의 눈물이 2002년의 영광을 낳았듯, 2026년의 참사는 2030년 세계를 다시 한번 놀라게 할 대한민국 축구의 위대한 반전 드라마를 위한 최고의 자양분이 될 것이다.
[강해영 마니아타임즈 기자/hae2023@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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