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1.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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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박사 기자의 스포츠용어 산책 1602] 북한은 왜 ‘여자축구’를 ‘녀자축구’라고 말할까

2025-11-11 08:22

우승 트로피를 들고 기뻐하는 북한 U-17 여자 축구대표팀 선수들 [EPA=연합뉴스]
우승 트로피를 들고 기뻐하는 북한 U-17 여자 축구대표팀 선수들 [EPA=연합뉴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10일 ‘어머니 조국에 승리의 월드컵을 또 다시 안아온 미더운 녀자축구선수들’이라며 1면 기사 제목으로 FIFA 2025년 U-17 여자 월드컵 2연패 사실을 소개했다. 기사는 북한 대표팀이 9일(한국시각) 모로코 라바트에서 열린 결승전에서 네덜란드를 3대 0으로 완파하고 우승컵을 거머쥐었다며 “우리 선수들은 시작부터 주도권을 확고히 틀어쥐고 경기를 박력 있게 운영했다”며 “세계의 수많은 축구 전문가와 애호가들, 관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고 전했다. 노동신문은 이번 우승이 단순한 체육 성과를 넘어 정치적 의미를 지닌다고 해석했다. 신문은 “당 제9차 대회를 승리자의 대회, 영광의 대회로 맞이하기 위한 총진군에서 새로운 기적과 위훈을 창조해가는 온 나라 인민들에게 커다란 고무적 힘을 안겨주고 있다”고 강조했다. 내년 초 열릴 조선노동당 제9차 대회를 앞두고 국민 결속과 체제 자신감을 고취하기 위한 의도로 풀이된다.

북한에선 ‘여자축구’를 ‘녀자축구’라고 말한다. 우리말의 ‘녀자’가 ‘여자’로 변한 것은 ‘두음법칙’ 때문이다. ‘여성’의 ‘여(女)’는 원래 중세국어에서 ‘녀’로 발음됐다. 예를 들어 ‘훈민정음 해례본’(1446)에는“女는 녀라 하니…”라고 되어 있다. 근대 이후 ‘녀’가 ‘여’로 변한 것은 두음법칙(頭音法則) 때문이다. 단어 첫머리의 ‘ㄴ’이나 ‘ㄹ’ 소리가 탈락하는 한국어의 음운 규칙이다. 그래서 여자는 여자, 로동은 노동, 리론은 이론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북한은 이를 ‘조선말의 본래 모습을 왜곡한 인위적 변화’로 해석했다. 1949년 김일성은 “조선말을 순수하게 발전시켜야 한다”고 강조했고, 이후 북한 언어학계는 두음법칙을 ‘봉건적·식민지적 잔재’로 규정했다. 결국 1960년대 제정된 ‘조선어 표준말 규범집’에서 두음법칙은 폐지되고, ‘녀자’가 공식 표기 형태가 되었다.

남한의 ‘여자’는 생물학적·사회적 성별을 지칭하는 중립적 표현이다. 그러나 북한의 ‘녀자’라는 단어는 단순히 여성의 생물학적 존재를 뜻하지 않는다. 북한 사회에서 ‘조선녀자’는 혁명과 건설의 동지, 수령에게 충성하는 인민의 존재를 의미한다. 신문과 방송은 “조선녀자들은 위대한 수령님의 품속에서 혁명가로 자랐다”고 노래하며, 모성과 투쟁심을 함께 강조했다. 언어 속 ‘녀자’는 약한 존재가 아니라, ‘혁명적 주체’로 상징화되었다. 북한의 ‘녀자’는 단어이자 이념, 말이자 신념인 것이다.
북한은 언어를 ‘사상의 그릇’으로 보았다. 말은 사고를 결정하고, 사고는 체제를 떠받친다고 여겼다. 따라서 언어의 자주화는 곧 사상의 자주화였다. ‘녀자’, ‘로동’, ‘리론’, ‘락원’ 같은 단어는 그 자체로 자주와 순수의 상징이 되었다.
남한이 근대적 표준화 과정을 거쳐 서구식 문명국가의 언어 규범을 따랐다면, 북한은 민족어의 원형을 되살려 ‘혁명적 언어’를 만들려 했다. 이념은 곧 언어 속에서 살아 움직였다.
남한의 ‘여자’는 개인과 사회의 평등, 자아실현의 의미를 담았다면, 북한의 ‘녀자’는 집단 속 헌신과 체제 충성을 의미한다. 같은 글자 ‘女’이지만, 그 발음의 뉘앙스에는 서로 다른 가치관이 깃들어 있다.

[김학수 마니아타임즈 기자 / kimbundang@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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