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스포츠 100년](15)조선체육회 창립

정태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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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0-04-13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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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김규식이 맨손체조를 지도하는 모습
조선체육회 고고성 울려
동아일보에 변봉현이 '조선에서의 체육기관의 필요성을 논함'이란 제목으로 세 차례 논설이 나가고 난 뒤 조선의 체육 기관 설립은 기정사실화 되었다. 동아일보 간부, 특히 설산 장덕수 주필이 적극적으로 후원했고 일반 사회에서도 격려와 협조가 뒤따랐다. 덩달아 소위 유의청년들의 발걸음도 바빠졌다.

변봉현의 논설이 나간 지 2개월이 지난 1920년 6월 16일 오후 6시 인사동에 있는 명월관 별유천지에서 전국에서 47명이 참석한 가운데 조선체육회 첫 발기인회가 열렸다. 이 발기인회에서는 창립준비위원으로 윤기현, 변봉현, 원달호, 이동식, 김병태, 이중국, 유문상, 이원용, 김동철, 김규면 등 10명을 선출해 발기인의 인선, 창립취지문, 창립 날짜 및 총회에 필요한 모든 제반 사항들을 위임했다. 위원장은 10인 위원 가운데 최고 연장자인 윤기현이 맡았다.

동아일보는 1920년 6월 18일 자 3면에 ‘체육협회 발기, 십륙일 오후에, 오십 명 유지가’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근래에 여러 가지로 새로운 사업이 많이 일어나는 중, 특별히 한민족의 쇠하고 성함에 큰 관계가 잇는 체육에 대하여는 아직까지 현저한 운동이 없는 것은 매우 유감으로 여기던 바이더니 지난 16일 오후 6시에 이에 대하여 뜻있는 몇 분이 시내 명월관 지점에 모여서 체육회를 발기하였다는데 우선 창립위원 10명을 선정하고 여러 가지 의견을 교환한 후 폐회하였다는데, 당일 출석한 사람은 고원훈 이동식 장두현 씨 외에 47인이었더라.”

발기인 총회에 대한 조언과 인선은 장덕수 동아일보 주필의 자문과 협조를 받았다. 발기인 선정은 세 가지 기본원칙을 세우고 이에 알맞은 인사로 인선을 했다. 첫째는 먼저 학교 교장이나 학교를 대표할 만한 인사이거나 둘째 사회 유지로 친일적 색채가 없는 인사, 셋째 운동경기를 좋아하는 체육인으로 구별해서 전국적으로 인물을 구했다. 이렇게 해서 발기인을 모았는데 그 중 사회 인사의 상당수는 장덕수가 추천한 인물들이었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1920년 7월 13일 오후 8시 인사동에 있는 중앙예배당에서 7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조선체육회 창립을 선포하는 역사적인 창립총회가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그동안 매일신보에 비해 조선체육회 창립에 기사를 거의 게재하지 않았던 동아일보는 조선체육회가 창립한 이날 4면에 다음과 같은 창립 예고기사를 실었다.

“조선체육계의 펼치지 못함을 유감으로 생각하야 조선 청년계에 크게 운동 사상을 고취하고 일반체육의 장려를 실행할 목적으로 조선체육의 주요 제씨와 기타 온 조선의 유지 제씨가 발기한 톄육협회는 점점 사업이 진행하야 금 십삼일 오후 팔시에 중앙례배당 안에서 창립총회를 열 터인데 경성 시내의 발기인 제씨와 조선 각디의 발기인들을 합차야 칠십여인이 모히어 자못 성대히 개최하리라더라.” <동아일보 1920년 7월 13일자>

발기인 총회는 보성전문 고원훈 교장이 사회를 맡았으며 동아일보 장덕수 주필이 발기인을 대표해 창립취지서를, 변호사 이승우가 규약을 낭독해 이를 만장일치로 통과시키고 뒤이어 조선체육회 창립총회를 갖는 순서로 진행됐다. 창립취지서는 장덕수가 썼고 모두 35조로 된 규약은 이원용, 이중국이 작성하여 배재고보 교무주임인 이중국의 형인 이중화의 교열을 받았다.

창립총회는 준비위원들이 계획한 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기관 명칭을 조선체육회로 한다는 데 전원 동의했다. 이들은 명월관 지점 별유천지로 장소를 옮겨 피로연을 베풀고 이 자리에서 전형위원들은 보성전문학교장 고원훈, 동아일보 주필 장덕수, 동일은행 행원 임긍순, 야구인 윤기현, 변호사 이승우, 서울 YMCA 회원 이원용, 보성고보 교장 정대현, 경성직물 사장 유문상 등 8명을 이사로 선임했다.

이들 이사들이 다음날인 7월 14일 동양물산주식회사를 방문, 장두현 사장을 초대 회장으로 추대하면서 조선체육회는 골격을 갖추게 되었다. 장두현 초대 회장은 민족정신이 매우 강한 종로의 대실업가로 YMCA 이상재 총무와 친분이 두터워 독립운동에 힘을 보탠 인물이다.

조선체육회는 창립한 뒤 거의 1년 가까이 사무실도 없이 술집 등을 전전하며 모임을 가지다 1921년 고원훈 보성전문학교 교장이 2대 회장에 취임하면서 보성전문 학교 한 구석에 체육회 책상을 마련하고 사무를 볼 수 있었다.

항일의 첨병으로 출범한 조선체육회

조선체육회 출범에 대해 반드시 주시해야 할 부분이 있다.

바로 창립연도와 명칭이다. 먼저 창립연도를 보면 3·1독립운동이 일어나고 1년 뒤였다. 냉정하게 보면 조선체육회는 1910년 한일늑약 이후 무단정치로 일관해 오다 전국적이고 거국적으로 조선의 독립을 요구한 3·1독립운동에 영향을 받은 일제가 문화정치로 전환한 데 따른 반대급부의 성격이 강하다.

그렇지만 실제로 일제는 겉으로 문화정치를 내 세우면서도 내부적으로는 우리의 민족운동 일거수일투족에 대해 감시의 눈초리를 더욱 매섭게 부릅뜨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조선체육회 창립은 일제의 총검에 독립운동이 무산된 좌절감, 달랠 길 없는 울분에다 솟구쳐 오르는 민족 감정이 한데 어우러지면서 ‘건민(健民)과 신민(新民)’을 통한 저항 의지이자 민족주의 운동의 하나로 표출된 것이었다. 건민이란 국민들을 건강하게 만들자는 뜻이고 신민은 국민들을 새롭게 깨우친다는 의미가 담겼다.

이는 바로 조선체육회라고 명명한데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즉 조선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들이 중심이 되어 3·1독립운동이 일어나기 한 달 전인 1919년 2월 8일에 조선체육협회를 조직했는데 여기에서 ‘협’(協)자만을 빼고 조선체육회라고 명명했다. 이는 현실적으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관계이지만 조선 민족은 절대로 일본민족보다 못하지 않다는 민족적 자존심과 긍지가 깔려 있을 뿐만 아니라 서로 한번 겨뤄보자는 경쟁의식의 발로이자 도전의 의지가 나타난 것으로 해석된다.

조선체육회 창립취지서에서도 이를 은근히 강조하고 있다. 사람은 원래 천지에 흐르는 약동의 생명과 충실의 생명과 웅장의 생명을 받아 태어났지만 우리 민족의 얼굴은 채색(菜色·병들거나 굶주린 사람의 혈색으로 누르스럼한 푸성귀 빛깔)이고 신체는 버드나무 가지 같이 가늘고 힘이 없으며 정신은 혼미하다고 한탄하고 있다. 이것은 개개인의 불행이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국가의 쇠퇴를 가져와 지금까지 미치고 있으며 장래에도 자손에게까지 미쳐 멸망으로 갈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이는 바꾸어 말하면 운동을 열심히 해서 웅장하고 강건한 신체를 가지고 국가의 쇠퇴와 장래 멸망에 이를 수 있는 길을 막자는 뜻이 담겨있다. 체육을 통한 항일(抗日)이자 반일(反日)이며 극일(克日)이나 마찬가지다. 요즘으로 치면 체육의 내셔널리즘(nationalism), 즉 조선체육회 창립은 체육 민족주의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태어났다고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다.

[정태화 마니아리포트 편집인/cth082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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