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스포츠 100년](4)운동회에 독아(독아) 드러낸 일제

정태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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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0-02-18 0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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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의 운동회 모습
조선의 국운이 서구 열강에다 호시탐탐 대륙진출을 노리는 일본과 중국의 틈새에 끼여 풍전등화에 놓였을 때 우리나라 근대스포츠는 운동회를 시작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관립외국어학교의 영어학교에서 화류회로 시작된 운동회는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기독교 계통의 선교사들이 설립한 근대식학교뿐만 아니라 전국에 유행병처럼 번진 청년회들이 주최하는 운동회가 줄을 이었다.

운동회에서 하는 체육행사라야 빈 공터를 2바퀴, 4바퀴 도는 초보 달리기부터 멀리뛰기, 높이뛰기, 포환던지기, 2인3각 정도가 고작이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조선인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조선인들은 처음보는 광경에 열광했고 덩달아 전국은 운동회 열풍에 휩싸였다.

이들 운동회의 특징은 무엇보다 기울어져 가는 조선의 국권을 되찾아 자주독립을 이루어야 한다는데 초점이 맞추어졌다. 이를 위해 소년들이 청년들이 몸을 튼튼하게 해야 하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운동과 위생을 생활화를 강조했다.

무엇보다 운동회가 끝난 뒤의 행사가 백미였다. 운동회에서 시상식을 마치고 난 뒤에는 전부 한데 모여 '황제폐하 만세' '대한제국 만세'를 삼창했다.

1905년부터 1909년까지 5년 동안은 전국적으로 운동회의 전성시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였다. 1905년 5월 22일에는 신흥사에서 학교가 아닌 일반사회단체인 황성기독교청년회 주최로 운동회가 개최되었고 1906년 6월 10일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조직적 체육단체인 대한체육구락부 주최 운동회가 열렸다.

1907년 10월 26일에는 학부 주최로 관·사립학교 추계운동회, 1908년 5월 21일 학부 주최 관·사립학교 특별비원운동회 등이 대표적인 운동회였다.

하지만 이렇게 발전하던 연합운동회는 1909년 4월 30일 학부 주최의 관·사립학교 연합운동회를 마지막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아직 일제와의 강제 합병은 되지 않았지만 외교권과 국방권 등 상당부분을 장악하고 있던 일제가 보기에 운동회는 '악의 씨'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일제는 어떻게 하면 운동회를 중지시킬지에 골몰했고 조그만한 티끌이라도 생기지나 않을까하고 매의 눈을 뜨고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즉 1910년 한일늑약이 있기 전까지 사립학교나 사회단체 주최의 운동회는 아직 대한제국이 주권국가였기 때문에 일제의 노골적인 간섭이나 통제가 어려웠다.

따라서 일제는 운동회 개최를 방해하는 데 주력을 했다. 운동회의 절차와 시기를 학부와 상의해서 정했는데 학부를 통해 개최 횟수나 참여 범위를 제한하거나 예산부족을 이유로 예산지원을 거부하는 등 갖은 방해공작을 폈다.

그러다가 일제는 이해 12월 27일 드디어 독아를 드러냈다. 학부의 재정난을 핑계로 1910년부터 연합운동회를 모두 폐지하도록 각 지방 관·공·사립학교에 훈령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서울 시내 오성학교, 보성학교, 청년학관, 배재학당, 경신학교, 중앙학교, 휘문의숙, 양정학교 등 8개 사립중등학교에서는 학부의 경비 보조는 필요 없다고 항의하며 1910년 5월 14일 동소문 밖 삼선평에서 학교 직원과 학생 1,4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연합운동회를 강행했다.

오늘날 서울시중·고등학교 육상대회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이 연합운동회는 그때부터 학부의 도움 없이 연례행사로 개최되었는데 제3회 대회에 뜻하지 않은 불상사가 발생하고 말았다.

사건은 1912년 5월 10일 청파정(현 선린인터넷고등학교 자리)에서 8개 학교가 참가해 열린 제3회 연합운동회 장거리 경주에서 심판의 착오에서 비롯됐다.


당시 장거리 경주는 시간이나 거리의 정확한 측정을 하지 않고 운동장을 몇 바퀴 도는 것으로 거리를 정해 뛰었다. 그리고 선수가 마지막 결승선에 들어오면 심판이 등수를 매기는 깃발을 가지고 서 있다가 골인하는 순서대로 입상자를 시상대로 데려가는 엉성한 경기진행이었다.

그런데 이 장거리 경주에서 심판의 착오로 아직 한 바퀴가 남아 있는 선수에게 1착 깃발을 준 것이 발단이 돼 난투극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 난투극을 트집 잡아 일제는 5월 30일 내무장관 명령으로 연합운동회의 개최금지를 통첩했다.

8개 학교 대표들은 일제의 이 같은 처사에 불복해 이듬해인 1913년 10월 10일에 제4회 연합운동회를 삼선평에서 강행하였는데 일제는 교육에 지장을 준다는 구실을 내세워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후 사립학교 운동회는 완전히 폐지되고 말았으며 이후로는 개별 학교 단위의 운동회만 열렸고 연합운동회는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소위 '청파정 사건'이다.

운동회의 경기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이루어 졌지만 일반인들이 후원하고 관중들도 일반인들이었다. 따라서 운동회는 학교 체육이라는 틀을 벗어나 사회인들에게도 체육을 보급시키고 체육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따라서 일제가 순수한 체육활동의 하나인 운동회에 대해 탄압의 독아를 드러낸 데는 일제 강점으로 우리 민족이 그 치욕에 분노해 운동회가 집단적 의거로 발전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으로 보인다.

실제로 1910년 7월 13일 조선주차헌병대사령부에서 열린 각도 헌병대장 회의에서 당시 학부 차관인 다와라 마고이치는 “운동회에 묵과할 수 없는 폐단이 있다. 학교연합운동회는 단순히 규모의 광대성뿐만 아니라 나팔 행진을 하고 북을 치며 마치 무장적 시위행진을 하는 식의 운동회로서 군사적 행동이다. 그 결과 학업을 빙자하여 불산한 경거망동을 꾀하는 것이다”며 조선인들의 결집을 두려워했다.

처음에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각종 경기나 유흥들로 시작한 운동회가 자주독립과 자강을 주장하는 민족주의적 성격을 띠게 되면서 위협을 느낀 일제가 우리 체육행사에 탄압의 독아를 드러내 첫 등장한 지 20년도 채 되지 않아 사라지게 되었지만 일반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후원함으로써 활성화되었던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1896년 영어학교의 첫 운동회를 시작으로 1910년까지 개최된 운동회는 학교 주최 166회, 사회단체 19회, 기타 28회 등으로 모두 213회에 이르고 있으며 이 가운데 서울이 135회로 가장 많았다.(이학래 저, 한국체육 100년사)

따라서 운동회는 학교체육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일반 사회인들에게 체육을 보급하고 체육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어 사회체육의 성격을 강하게 지녔다고도 할 수 있다.

[정태화 마니아리포트 편집인/cth082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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