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10.0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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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박사 기자의 스포츠용어 산책 1928] 스키에서 ‘슬로프(slope)’는 어디에서 왔을까

2026-10-07 06:46

 용평 스키장 슬로프 모습
용평 스키장 슬로프 모습
스키를 타는 사람에게 ‘슬로프(slope)’는 익숙한 단어이다. 스키를 탈 수 있도록 정돈된 눈 언덕(코스)이라는 의미로 이 말을 즐겨 사용한다. 이 말은 영어말로 애초 스키를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스키보다 훨씬 오래된 단어이다. (본 코너 1907회 ‘왜 '스키(ski)'라고 말할까’ 참조)

영어 slope 어원은 아주 오래된 유럽 언어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세 영어 'aslope'(기울어진, 비스듬한) 및 고대 영어 'aslupan'(미끄러지다, 미끄러져 떨어지다)과 같은 말을 거쳤다. '미끄러지다(slip)'라는 어원 계통에서 파생돼, 땅이나 지면이 '경사진 곳, 비탈면'을 뜻하는 명사로 정착했다. 17세기부터 본격적으로 '기울어진 지형'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평평한 땅이 아니라 한쪽으로 기울어진 상태. 수평이 아니라 비스듬한 상태. 바로 이 물리적 특성을 나타내는 말에서 오늘날의 slope로 발전했다. 그래서 영어에서 slope는 산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도로에도 slope가 있고, 지붕에도 slope가 있으며, 수학에서도 slope가 있다.

수학에서 말하는 ‘기울기’ 역시 같은 개념이다.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 갈 때 얼마나 가파르게 높이가 변하는지를 나타내는 것이 바로 slope다. 결국 스키장에서 말하는 슬로프도 본질적으로는 아주 단순하다.

스키의 역사를 생각해보면 왜 이 말을 쓰게됐는지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 스키는 본래 산악지대에서 이동을 위한 수단으로 발전했다. 눈 덮인 산과 언덕을 내려오는 행위 자체가 스키의 핵심이었다. 그리고 근대적인 스포츠로 발전하면서 사람들이 스키를 타는 일정한 경사면을 설명할 필요가 생겼다.


영어권에서는 이 공간을 ‘ski slope’, 즉 ‘스키를 타는 경사면’이라고 표현했다. 이 표현이 스키 문화와 함께 널리 퍼지면서 우리나라에도 ‘스키 슬로프’라는 말이 들어왔다.

우리나라 언론은 1960년대이후 슬로프라는 말을 본격적으로 사용했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 따르면 경향신문 1962년 1월20일자 ‘오늘全國學生(전국학생) 스키開幕(개막) 大關嶺(대관령)서 大統領旗爭奪(대통령기쟁탈) 겸해’ 기사에서 ‘제14회 전국학생「스키」선수권대회 겸 제2회 대통령기쟁탈 학생「스키」대회가 20일부터 연4일간 대관령 슬로프에서 개막된다’고 전했다. 지금으로부터 60여 년 전, 우리나라의 스키가 아직 대중적인 겨울 스포츠로 자리 잡기 전의 신문 지면에서 이미 ‘대관령 슬로프’라는 표현이 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한 문장은 꽤 많은 것을 말해준다. 1960년대의 대관령은 한국 스키의 역사에서 특별한 장소였다. 오늘날처럼 전국 곳곳에 대형 스키장이 들어서기 전이었다. 스키를 탄다는 것은 곧 겨울의 산으로 찾아간다는 뜻에 가까웠다. 그 시절 신문에 등장하는 스키 관련 기사들을 따라가다 보면 ‘대관령’이라는 지명이 자주 등장한다.

대관령은 단순히 높은 고개가 아니었다. 한국 스키가 근대적인 스포츠로 자리 잡아가는 현장이었다. 그곳에서 선수들이 스키를 신고 눈 위를 달렸고, 대회가 열렸으며, 사람들은 스키라는 새로운 겨울 문화를 구경했다. 그리고 그 풍경을 설명하는 데 슬로프라는 말이 사용됐다.

이렇게 보면 슬로프의 한국 정착은 단순한 외래어의 수입이 아니다. 스키라는 새로운 스포츠 문화가 들어오면서 그 문화를 설명하는 언어도 함께 들어온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스키 장비만 외국에서 들어온 것이 아니다. 스키를 타는 공간을 부르는 방식도 함께 들어온 것이다.

[김학수 마니아타임즈 기자 / kimbundang@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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