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어어원사전에 따르면 원래 세트는 종교 공동체를 뜻하는 중세 라틴어 ‘Secta’에서 유래됐다. 고대 프랑스어로 순서를 뜻하는 ‘Secte’를 거쳐 영어로 유입됐다. 테니스 게임 등에서 한데 모으는 의미로 1570년대부터 세트라는 말을 썼다. 미국 야구에선 초창기부터 세트라는 말을 투수들의 큰 움직임이 없는 동작을 의미하는 뜻으로 썼다. 세트 포지션(Position)은 주자가 베이스에 있을 때, 투수가 투수판 위에서 주자를 견제하고 타자에게도 투구를 할 수 있는 자세를 뜻한다. 1895년 출발한 배구에서 세트라는 말은 테니스 등에서 썼던 말을 이어 받아 초창기 때부터 사용했다. (본 코너 483회 ‘배구에선 왜 게임(Game)이 아닌 세트(Set)라고 말할까’ 참조)
배구에서 세트라는 말은 세터가 공격수들이 공격할 수 있도록 볼을 띄워주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보통 국내 배구서는 토스(Toss)라는 일본식 영어로 쓰는데 정확한 국제 표준용어는 세트가 맞다. (본 코너 455회 ‘토스(Toss)는 일본식 영어, 세트(Set)가 정확한 영어 표현이다’ 참조)
우리나라 언론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세트라는 말을 사용했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 따르면 동아일보 1927년 6월12일자 ‘去益緊張(거익긴장)한塲內(장내)에 凖决勝戰(준결승전)의成績(성적) 朝鮮體育會主催(조선체육회주최) 東亞日報社後援(동아일보사후원) 第七回全朝鮮庭球大會(제칠회전조선정구대회)’ 기사에서 경기 내용을 알리면서 세트라는 단어이 등장했다. 남한에서 세트라는 말이 정착한 데에는 일제강점기 체육 교육의 영향이 크다. ‘セット(setto)’, ‘ゲーム(game)’ 등으로 부르는 일본식 체계가 그대로 이어졌던 것이다.
북한 배구에선 세트를 순우리말인 ‘판’ 또는 ‘경기판’이라 부른다. 판이라는 말은 조선어에서 오래전부터 썼다. ‘씨름판’, ‘장기판’, ‘놀이판’, ‘싸움판’, ‘한판 붙다’ 할 때 쓴다. ‘하나의 승부가 완결되는 단위’라는 뜻이 들어 있다. 배구의 세트도 점수가 정해져 있고, 승패가 갈리며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완결된 승부 단위이다. 북한식 개념화에선 ‘판’이 훨씬 직관적이다.
북한 중계나 규정문을 보면 ‘첫째 판’, ‘셋째 경기판’, ‘결정판’같이 쓰이는데, 여기엔 구조적 구분이 숨어 있다. 북한은 해방 이후 일본식·영미식 체육 용어를 ‘사대주의적 잔재’로 규정하고 조선어화 작업을 체계적으로 진행했다. 세트는 판으로, ‘로테이션’은 ‘자리돌림’으로, ‘리베로’는 ‘자유방어수’로 바뀌었다. 용어 정리는 곧 사상 정리였고, 언어는 체육 규칙을 설명하는 도구를 넘어 세계를 해석하는 틀이었다. (본 코너 1680회 ‘북한 배구에서 왜 '리베로'를 '자유방어수'라고 말할까’, 1688회 ‘북한 배구에서 왜 '로테이션'을 '자리돌림'이라 말할까’ 참조)
특히 ‘결정판’이라는 표현은 북한 배구 용어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이는 단순한 마지막 세트가 아니다. 승부가 최종적으로 가려지는 국면, 집단의 집중과 정신력이 시험대에 오르는 순간을 가리킨다. 북한식 스포츠 담론에서 한 ‘판’은 개인의 기량보다 조직력과 태도가 드러나는 무대다.
[김학수 마니아타임즈 기자 / kimbundang@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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