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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박사 기자의 스포츠용어 산책 1584] 북한에선 왜 ‘심판’을 ‘재판원’이라 말할까

2025-10-24 07:44

 북한에서의 여자배구 경기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
북한에서의 여자배구 경기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
북한에서 쓰는 스포츠용어 중 남한과 비교해 가장 낯선 단어를 꼽으라면 아마도 ‘재판원’일 것이다. 남한에서 재판원을 법정에서 재판을 하는 이를 말하지만, 북한에서 재판원은 남한의 심판과 같은 말이다. 심판이나 재판원은 영어 ‘레프리(referee)’, ‘저지(judge)’, ‘엄파이어(umpire)’에 대한 번역어이다. 공정한 경기를 진행하는 이를 재판원이라 말하는 것은 북한 특유의 언어 철학과 사상체계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본 코너 513회 ‘배구에서 레프리(Referee)를 심판(審判)이라 말하는 이유’, 1301회 ‘복싱에서 왜 ‘레프리’와 ‘저지’라고 말할까‘ 참조)

심판과 재판원은 어원에서 큰 차이가 있다. ‘심판(審判)’은 본래 ‘살펴서 판단한다’는 한자어이다. 개인의 판단, 중립적 결정을 강조하는 의미이다. 인터넷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해보면 ‘심판’이라는 단어는 1895년 갑오경장 이후 국역 2회, 원문 15회 등 총 17회 나온다. 일본의 영향을 받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말로 보인다.

‘재판(裁判)’은 ‘옳고 그름을 가른다’는 의미이다. ‘공정하게 판단해 질서를 세운다’는 공권적 뉘앙스를 지닌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재판’이라는 말은 태종실록 이후 국역 309회, 원문 445회 등 총 754회 나온다. 이는 조선시대부터 재판이라는 말을 많이 썼던 것으로 판단된다.

북한에서 사용하는 ‘재판원’은 단순한 경기 진행자가 아니라, ‘규율과 질서를 세우는 인민의 대표자’라는 상징적 의미를 띤다. 북한은 언어를 단순한 의사소통 수단이 아니라 사상 교양의 도구로 본다. 조선말규범집(1966년)에 따르면 모든 말에는 ‘사상성’이 있어야 한다. 체육용어도 인민적이며 사상성을 뚜렷하게 갖고 있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이 원칙에 따라 개인적 판단의 느낌이 강한 비사회주의식의 단어인 ‘심판’보다는 인민의 법, 규범에 따른 판정자로 사회주의적·공적 의미가 강화된 인상을 주는 ‘재판원’을 쓰게 된 것으로 해석된다.


북한에서 체육은 단순한 경기나 오락이 아니다. 북한 공식 기관지 노동신문은 “체육은 혁명가의 기질을 키우는 사상사업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이런 맥락에서 재판원은 단순히 반칙을 판정하는 사람이 아니라 경기의 사상적·도덕적 질서를 지켜내는 역할을 한다. 경기 중 ‘재판원’이 불공정하면 “사상적 결함이 있다”고 비판받을 수 있다. 즉, 경기의 질서는 사회주의 질서의 축소판으로 보기 때문이다.

북한의 방송이나 신문 등에선 재판원과 관련한 표현 등을 자주 볼 수 있다. “재판원이 정확한 판정을 하여 경기의 공정성을 보장하였다”(조선중앙TV 중계), “재판원들이 혁명적 원칙성과 당성을 발휘하였다”(노동신문 보도)며 재판원과 관련한 말들을 확인할 수 있다.

북한 체육에서 재판원은 경기의 규칙을 지키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 ‘혁명적 질서의 수호자’, ‘인민의 정의를 구현하는 사람’으로 자리매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김학수 마니아타임즈 기자 / kimbundang@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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