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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수의 사람 ‘人] 원로농구인도 MZ 선수도 모두 아는 ‘회장님, 우리 회장님’…박소흠 한국중고농구연맹 회장

2024-02-05 06:19

국제대회 선수단장으로 참가한 박소흠 한국중고농구연맹 회장.
국제대회 선수단장으로 참가한 박소흠 한국중고농구연맹 회장.
농구계에서 ‘그를 모르면 간첩’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김영기 전 한국농구연맹(KBL) 총재, 방열 전 대한농구협회(KBA) 회장, 이인표· 조승연 전 KBL 패밀리 회장, 박한 전 KBA 부회장, 김인건 전 태릉선수촌장 등 원로 농구인들은 당연히 그를 잘 안다. 오래전부터 인연을 이어오며 농구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기 때문이다. 허웅·허훈 형제 등 남녀 국가대표나 청소년 대표를 지낸 이, 또는 현재 국가대표나 청소년 대표를 하는 선수들도 모두 그를 만난 적이 있다. 아시안게임이나 아시아선수권 대회 등에 출전하면서 그로부터 격려와 함께 축하금까지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각종 국제대회에 참석하거나 귀국한 국가대표 선수들과 코칭스태프들에게 성적과 관계없이 위로하는 자리를 만들어줬다. 박소흠(72) 한국중고농구연맹 회장이다.

그는 농구를 좋아하지만 원래 농구인 출신은 아니다. 울산에서 선박 배관을 납품하는 기업을 운영하는 경영자이다. 하지만 농구에서 그 누구보다도 열정을 보인다. 액수를 밝힐 수는 없지만 그동안 농구를 위해 많은 돈을 썼다. 협회와 대표팀을 위해 봉사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돈을 쓰는데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정상적인 농구인이라면 그를 모를 수 없는 이유이다. 일부 농구인들은 농구인 출신으로 ‘한국농구 대모’로 추앙받은 윤덕주(1921~2005) 전 대한체육회 및 대한농구협회 부회장에 이어 그를 비농구인 출신으로 농구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지난 1월 30일 서울 청담동 리베라 호텔에서 열린 대한농구협회 이사회를 마친 박 회장과 만났다. 필자가 2012년부터 2016년까지 대한농구협회 홍보이사로 활동한 이후 오랜만의 만남을 가졌다. 여러 해가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농구를 떠나지 않고 있다. 농구에 관한 열정과 관심이 아직도 뜨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필자는 4년간 대한농구협회 홍보이사로 재임할 때 가깝게 지내며 그가 하는 일을 가까이서 봤다. 박 회장은 2000년 울산 농구협회장을 시작으로 농구와 인연을 맺었다. 2009년부터 한국중고농구연맹 회장을 맡아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06년부터 대한농구협회 부회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

그간 한국농구는 부침을 겪었다.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남녀농구가 사상 처음으로 동반우승을 달성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2022년에는 18세이하 아시아남자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남자농구는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본선 출전이후 2000년대들어 한번도 올림픽 본선 무대를 밟아보지 못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 이어 2021년 도쿄올림픽에 출전했던 여자농구는 지난 해 국제농구연맹(FIBA) 아시안컵 5위에 그치며 파리올림픽 예선 티켓마저 놓쳤다. 1965년 첫 출전이래 아시안컵에서 한국이 4강에도 오르지 못한 것은 최초였다.

박 회장은 각종 국제대회에 단장을 맡아 대표팀과 함께 참가했다. 2007년 아시아여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할 때의 단장을 시작으로, 202년 도쿄올림픽 여자농구 최종 예선전 단장까지 10여 차례나 맡았다. 오랫동안 국제대회 현장에서 남녀 대표팀의 고락을 함께 하다보니 한국농구의 문제점과 앞으로의 대책에 대해 익히 잘 알고 있었다.

박 회장은 “우리나라 농구는 심각한 저출산 문제로 인해 존폐의 기로에 서 있다”며 “학령인구 감소에 따라 적잖은 학교가 6~8명(농구 엔트리는 12명)으로 운영할 정도로 선수 수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밝혔다. 저출생의 경고음이 벌써 농구에서 울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스포츠는 키 큰 순서대로 망할 것”이라며 자조적인 말을 쏟아냈다.

실제로 통계 자료를 보면 그의 우려가 결코 기우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대한체육회의 초·중·고·대학 등록 선수 자료에 따르면 2005년 2758명이던 학생 농구선수는 지난해 2237명으로 19% 줄었다. 0.7대로 추락한 한국의 출산율을 고려하면 감소 추세는 더욱 가팔라질 것으로 보인다. 이대로 가다간 키 큰 종목부터 무너질 것으로 우려된다.

박 회장은 “농구는 키가 커야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신체조건이 좋은 어린 친구들이 과거보다 크게 줄어 선수 수급도 제대로 잘 안되고 있다”며 “저출산으로 결국 전체 학교체육의 기반이 흔들림에 따라 농구 위상도 점차 추락하고 말 것”이라고 우려했다.

박소흠 한국중고농구연맹 회장이 이기흥 대한체육회장과 악수를 하고 있다.
박소흠 한국중고농구연맹 회장이 이기흥 대한체육회장과 악수를 하고 있다.


한국농구, 이대로 둘 수 없다

박 회장은 지난 수십년 동안 회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매우 운이 좋았다고 했다. “프로농구가 인기가 절정이었고, 아마농구도 프로농구 흥행 성공에 힘입어 그런대로 잘 돌아갔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전부터 농구계 전체에 저출산이라는 사회적 문제가 닥치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앞으로 획기적인 변화를 하지 않으면 한국 농구는 좀처럼 침체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아라고 말했다.

그의 생각은 농구인들과 같다. 풀뿌리인 중고농구가 흔들리면 대학 및 프로농구도 그 여파가 미치며 힘들 수 밖에 없다고 한 것이다. 국내 농구 여건은 예전부터 일본이나 중국과는 선수 수에서 비교적 되지 않은 가운데 선수 수급 문제가 항상 어려울 수 밖에 없었다. 특히 현재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고 판단한다.

박 회장은 “좋은 시절도 겪었지만 현재 중고농구협회장으로서 우리나라 농구 발전을 위해 마지막이라는 자세로 임하고 있다”며 “앞으로 내가 회장을 얼마나 더 할지 모르겠지만 지금 보다 좀 더 좋은 여건을 만들고 싶은 게 제 마음”이라고 했다. 현재 중고농구연맹은 문화체육관광부로 받는 국가 지원금이 10-15% 정도 줄어 재정 형편까지 힘든 상황이다.

박 회장이 회장 책임감의 무게를 크게 느끼는 것은 자신의 열정을 알아주는 농구인들 때문이다. 방열, 이인표, 박한 원로 농구인들은 지난 수십년간 그가 힘써온 노력을 이해하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격려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 원로 농구인들의 진심이 그의 마음을 동하게 해 수십년간 장수 회장으로 재임하고 있다. 특히 박한 전 대한농구협회 부회장과는 깊은 인간 관계를 맺으며 1년에 여러 번 만나 정겨운 술잔을 나누고 있다고 한다. 단신의 박 회장은 장신의 ‘두주불사형’ 박한 부회장과 술실력을 겨뤄도 막상막하라고 한다.

국제대회에서 우승을 한 뒤 선수들이 박소흠 회장을 헹가래 치고 있는 모습.
국제대회에서 우승을 한 뒤 선수들이 박소흠 회장을 헹가래 치고 있는 모습.


나는 코리아 마피아 박

박 회장은 오랫동안 회장으로 재임하면서 국제적으로 많이 알려졌다. 남녀 대표팀과 자주 해외 원정 경기를 다니다보니 아시아 연맹과 국제연맹 관계자들과 많은 친분을 갖게됐다. 양복 정장 차림에 카리스마와 자신감이 넘친 그는 외국 농구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코리아 마피아 박’으로 불린다. 체격이 작지만 강단있는 모습 때문에 붙여진 애칭이다. 국제농구연맹 심판위원장인 해로스(이란)와는 개인적 친분이 두텁다.

그는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상당히 엄한 편이다. 자신이 맡은 책임을 다하기 위한 때문이다. 박 회장은 “국제대회에서 우리 선수단이나 외국 선수단을 신중하게 대하는 것은 그만큼 그 분들의 책임이 크기 때문이다. 서로 가볍게 대하면 자칫 상대방도 그렇게 할 수 있다. 나 스스로도 책임이 크다고 생각해 실수를 하지 않도록 노력한다”고 말한다. 일본 농구협회 관계자들은 이같은 그의 스타일에 대해 존경심을 갖고 대한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를 어려워하지만 그의 내면 깊숙한 곳을 들여다보면 따뜻한 인간애를 갖고 있다. 외국 선수단이나 협회 관계자들이 방한을 하면 그는 정성이 담긴 선물을 전달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국내서도 여러 농구 선후배들에게 명절 때면 선물을 빠뜨리지 않고 보낸다.

전국체전에서 올산시 선수단 임원으로 참가한 박소흠 회장(왼쪽 끝).
전국체전에서 올산시 선수단 임원으로 참가한 박소흠 회장(왼쪽 끝).


농구와의 인연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지만 박 회장이 처음 울산농구협회장을 맡을 때만해도 지역에서 경기단체장은 지자체장의 권유에 따라 기업인들이 맡는 경우가 많았다. 기업인들이 경기단체 장을 맡으면 당장 기업인의 지원으로 협회가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02년 울산 심완구 회장(작고)이 울산농구협회장을 한번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첫 시작이었다. 당시 울산 시장은 인기종목인 축구, 농구를 맡을 협회장 후보를 직접 설득했던 것이다. 사실 당시 울산지역에는 중고농구팀이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처음 울산농구협회장을 맡은 박 회장은 적극적으로 활동해 원로 농구인들의 관심을 받게됐다.

박 회장은 “서울이나 지방에서 열리는 대회 때마다 원로 농구인들에 대한 예우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고 했다. 원로분들이 대접받는 모습을 보여야 현역 후배들이 농구에 더 깊은 애정을 보일 것이라고 판단하고 실행에 옳긴 것이다. 원로 농구인들이 박 회장이 있는 곳이면 전국 어느 곳이라고 스스럼 없이 찾아와 같이 농구 이야기 꽃을 피웠다.

그는 많은 사람들과 허물없는 자리를 가졌다. 청소년 대표선수들과는 자주 식사자리를 가졌다. 이렇다보니 그는 많은 선수들을 알게됐다. 최근 고교에서 프로팀으로 직행한 선수들 이름까지 외고 있을 정도이다. 인천 제물포고를 거쳐 서울 삼성에 입단한 차민석, 부산 중앙고 출신으로 울산 모비스에 입단한 서명진, 삼일상고 출신으로 전주 KCC 유니폼을 입은 송교창 등 이름이 그의 입에서 술술 나온다.

박 회장은 “남자프로농구인 KBL은 지난 수년전부터 중고농구연맹에 지원을 사실상 끊고 있다. 여자프로농구 WKBL은 KBL보다 여건이 더 어렵지만 그래도 중고농구연맹에 대해 상당히 호의적이다”라며 “프로팀들은 중고농구가 제대로 서지 않으면 존립기반이 크게 위협받을 수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프로와 아마가 함께 현재 위기에 대처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현재 중고농구연맹 전국 대회는 주로 지방 소도시에서 열린다. 올해도 강원도 양구, 전남 해남, 경이북 김천 등에서 벌어진다. 박 회장은 자신의 사업체가 울산에 있지만 전국 대회가 열릴 때면 거의 한번도 빠지지 않고 대회를 참관한다. 회장이 대회를 참관하면 대회 관계자들이 열심히 할 수 박에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회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중고연맹 대회는 심판 사고, 폭력 사태 등 단 한건의 불미스러운 일이 없었다.

박 회장의 앞으로의 바램은 농구인들이 신바람나게 농구에만 몰두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농구와의 인연이 얼마나 계속될 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생각한 목표가 이뤄지면 사업의 성공과 함께 인생의 행복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김학수 마니아타임즈 편집국장 kimbundang@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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