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서 한일전은 마치 전쟁을 방불케 하는 숙명의 라이벌전이었다. 사진은 2008 베이징올림픽 일본과의 준결승서 이승엽이 역전 투런 홈런포를 터트리고 환호하는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https://cgeimage.commutil.kr/phpwas/restmb_allidxmake.php?pp=002&idx=3&simg=20210721053418016895e8e9410871751248331.jpg&nmt=19)
한국 스포츠는 오랫동안 일본과의 라이벌 대결을 통해 성장했다. 근대 스포츠 도입이후 일본은 늘 숙명의 라이벌이었다. 초창기 모든 종목에서 일본을 넘보는 것조차 엄두를 내지 못하던 때도 ‘일본에 결코 질 수 없다’며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투혼을 발휘했다. 그래서 다른 나라에게 지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한·일전만은 절대적으로 승리를 놓쳐서는 안됐다. 만약 일본에 지는 날이면 국민 모두가 패배자로 여겼던 시절이 있었다.
한·일 역사는 가해자와 피해자 관계로 점철됐다. 일본은 가해자였고, 한국은 피해자였다. 삼국 시대이후 일본은 한반도에 수도없이 피해를 입혔다. 도둑떼로 불리는 왜구부터 정규 군대까지 동원해 전쟁을 일으켰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전국 통일을 완성한 뒤 우세한 군사력을 앞세워 일으킨 것이 1592년부터 7년간 이어졌던 전쟁이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이었다. 조선군은 이순신 장군이라는 불세출의 영웅이 일본군을 물리쳐 조선 반도를 지켜냈다.
기회만 나면 조선 반도를 공략할 명분을 찾던 일본은 천황이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서양 문명을 받아들이는 1868년 메이지 유신 개혁을 이룬 뒤 이른바 한국을 정벌한다는 ‘정한론(征韓論)’을 보수 우익의 강격 개혁파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등이 주장하며 호시탐탐 군대 파병 기회를 노렸다. 당시 대원군 집정의 조선이 일본을 배척하는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1875년 운요호(雲揚號)를 보내 강화도를 침공해 운요호 사건을 일으키며 강압적으로 강화도조약을 맺도록 했다. 조선은 강화도조약에 의해 강제로 쇄국정책을 포기하고 일본을 비롯한 외세에 개방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일본이 아시아의 맹주 청나라와 벌인 1894년 청일전쟁과 유럽 강대국 러시아와 벌인 1904년 러일전쟁은 한반도 지배를 놓고 벌인 전쟁이었다. 두 전쟁에서 일본이 이긴 결과 조선은 1905년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보호조약에 이어 1910년 국가가 사라지는 한일합방이라는 비극을 겪게됐다.
이런 역사의 인과관계는 서양에서부터 보급된 근대 스포츠에서도 반영됐다. 모든 종목에서 일본을 넘보는 것조차 엄두를 낼 수 없었지만 일본만큼은 꼭 이겨야 한다는 민족주의적인 승부관이 생겼다. 그래서 일본과의 스포츠 대결은 실제 전쟁을 방불케할만큼 치열한 승부가 펼쳐졌다. 한·일전이라는 말이 생긴 이유이기도 하다.
일제 강점기에는 민족적인 차별과 탄압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젊은 운동 선수들은 일본 선수를 만나면 지지 않기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자전차왕’ 엄복동(1892-1951)은 사이클에서 일본 최고의 선수들을 제치고 기미 독립선언 1년전인 1918년 전조선자전차대회에서 조선인 최초로 우승을 차지하며 ‘민족 영웅’으로 떠올랐다. 1929년 민족 정기를 잇는다는 명분으로 축구 경평전을 가지며 실력을 키우며 일본 축구에게 승리를 거둬 독립의 희망을 꿈꾸기도 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선 마라톤의 손기정(1912-2002)이 세계신기록을 세우고 우승을 차지해 민족의 한을 통쾌하게 풀어줬다. 손기정의 쾌거로 동아일보는 그의 유니폼에 붙어있던 일장기를 지우는 ‘일장기 말소 사건’을 주도해 일본 군국주의자들에 의해 폐간되기도 했다.
1945년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이후 1948년부터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걸고 올림픽에 참가한 이후 1952년 헬싱키올림픽서부터 일본과의 ‘올림픽 전쟁’이 벌어졌다. 올림픽에서 일본팀과 만나면 국민들을 잔뜩 긴장했다. 일본이 이미 아시아를 넘어 올림픽 강국으로 자리를 잡아 국력이 떨어지는 한국 스포츠가 일본을 넘보기에는 힘에 겨웠지만 선수들은 일본에게만은 ‘필승’을 거둬야 한다는 사생결단의 자세로 맞섰다. 전후 패배한 일본이 경제적인 성장과 국력을 과시하기 위해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올림픽을 개최한 1964년 도쿄올림픽에 한국은 224명으로 최대 규모의 선수단을 파견, 태극기를 앞세우며 전 세계에 존재감을 과시했다. 이 선수단 규모는 일본, 미국, 소련, 호주에 이어 5번째로 많은 것이었다. 당시 북한도 해방이후 처음으로 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해 일본땅을 밟았지만 극적인 부녀상봉이 이뤄진 세계적인 육상 선수 신금단 등 일부 선수가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승인하지 않은 인도네시아 가네포 대회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올림픽 출전을 불허하자 선수단을 철수하기도 했다.
한국은 1981년 서독 바덴바덴 IOC 총회에서 일본 나고야를 제치고 1988년 올림픽을 서울로 가져오는데 성공하며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는데 성공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동서화합의 장으로 만들었던 한국은 아시아에서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올림픽을 개최하는 나라도 발돋음하며 이후 아시아 무대는 물론 올림픽 무대에서도 일본을 누르고 세계 10대 스포츠 강국으로 자리잡았다.
올림픽 정신은 스포츠맨십을 통한 경쟁, 인류의 화합과 평화를 추구한다. 국가, 인종 간의 갈등을 극복하는 올림픽이지만, 한국에게 일본은 두 나라 사이의 아픈 역사적 경험으로 인해 그동안 오랜 라이벌 관계를 이룰 수 밖에 없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의 세계적 확산으로 1년간 연기됐다가 열리는 이번 도쿄올림픽은 올림픽 기본 정신으로 돌아가 한일간 선수들이 기량을 겨루며 감동을 선사하는 친선의 장이 되기를 기대한다.
[올림픽 특집] 한일스포츠, 라이벌 대결과 克日
1. 한일스포츠의 탄생, 애국과 문명화
2. ‘일본에 질 수 없다'...역대 올림픽서 나타난 반일 감정
3. 손기정과 일장기 말소사건
4. 남녀배구 한일전
5. 마라톤 한일전
6. 축구 한일전
7. 야구 한일전
8. 유도 한일전
9. 한·일스포츠 속의 양국 지도자
10. 진정한 극일, 승패보단 스포츠 정신
[김학수 마니아타임즈 편집국장 kimbundang@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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