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도쿄올림픽 주경기장 [연합뉴스 자료사진]](https://cgeimage.commutil.kr/phpwas/restmb_allidxmake.php?pp=002&idx=3&simg=20210720063340045635e8e9410871751248331.jpg&nmt=19)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 반도에 자리잡은 한반도와 섬나라 일본 열도는 근대 스포츠 도입과정이 비슷했다. 한국은 조선말인 19세기 말, 일본은 메이저 유신후인 19세기 말 미국과 유럽 등의 선교사와 교사등에 의해 근대 스포츠가 들어왔다. 주로 영국과 미국에서 탄생한 근대 스포츠를 보급했던 것은 애국과 문명화가 목적이었다.
시민의식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던 당시 스포츠는 신체를 향상시킨다는 의미인 한자어 체육(體育)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나라를 위하며 체력과 정신력을 만드는데 기여하고자 했다. 선진문명으로 받아들인 스포츠는 후진적인 당시 양국의 문명화를 이끄는 역할로 활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1895년 고종은 일본, 청, 러시아 등 열강의 다툼 속에서 쇠퇴해가는 나라의 힘을 회복하기 위해 국민에게 칙서(勅書)를 내렸다. “몸을 튼튼히 길러야 한다. 근육을 키우며 뼈를 튼튼히 만들라. 병에 시달리지 않는 건강한 생활을 누리도록 하라. 신민은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고, 나라를 위하는 마음으로 덕과 몸가 지를 올바르게 키워야 한다”는 교육 조서를 각급 신식학교에 하달했다. 체육을 통해 몸과 마음, 체력과 정신력을 강화해 애국하라는 의미였다.
일본도 메이지 유신 직후 전속 외국인 교사들이 취미로 들여온 스포츠가 학생들을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일본 근대 스포츠의 아버지로 불리는 영어 교사 프레드릭 윌리엄 스트레인지는 육상이나 보트, 야구 등 경기 보급에 노력했다. 1911년 유도의 전설적인 인물 가노 지고로(1860-1938년)가 일본체육협회를 설립했다. 그는 두 파로 나눠진 유술을 통합, 일본의 유도를 정착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다. 1909년 일본 최초이자 동양 최초의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됐다.
유럽과 북미 대륙의 전유물이었던 올림픽에 처음 눈을 띈 것은 일본이었다. 1912년 제5회 스톡홀름 대회에 선수 2명을 처음 출전 한 것을 시작으로, 일본은 올림픽에 참가했다. 제6회 베를린 대회는 제1차세계 대전으로 개최되지 못하다가 1920년 제7회 앤트워프 대회에서 일본은 테니스의 쿠마 카즈야가 최초의 은메달을 차지했다. 1928년 제9회 암스테르담 대회에서 육상 3단뛰기의 오다 미키오가 최초의 금메달리스트가 됐다. 오다 미키오는 이후 아사히 신문 운동부 기자로 활약하기도 했다. 이 대회에서는 히토미가 육상 800 미터에서 일본인 여자로서 처음으로 은메달을 획득하는 등 총 5개의 메달을 획득했다. 1932년 LA올림픽에선 육상 난부 추우헤이, 경영 미야자키 코우지 등 4명, 마장마술 니시 다케이치 등이 금메달 7 개를 획득하며 종합 5위를 달성했다. 특히 니시는 남작 출신의 귀족으로 태평양전쟁 말기 이오지마(유황도) 전투에서 전사하기도 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 이전까지 올림픽은 주로 개인 기량을 겨루는 장이었다. 그러나 베를린올림픽 때부터는 언론에서 점수제를 고안해 각국의 성적을 비교하기 시작했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이후로 올림픽 때마다 순위를 매기는 식이 됐다. 당시 여러 점수제를 종합하면 1936년 대회에서 가장 많은 점수를 딴 것은 독일이었다. 미국과 이탈리아가 그 뒤를 이었다. 일본은 영국도 제쳤다.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의 문으로 들어선다는 뜻인 ‘탈아입구(脱亜入欧)’의 사상을 기반으로 아시아 최초의 올림픽을 개최하려던 일본은 1940년 제12회 대회를 도쿄로 유치했으나 1937년 중일전쟁에 의해 중단됐다. 일본이 다시 올림픽에 참가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 후 1952년 제15회 헬싱키 대회부터였다. 일본은 고도 경제성장에 힘입어 전후 부흥의 상징으로 1964년 도쿄 올림픽을 개최하고 전통 스포츠인 유도를 정식 종목으로 채택시켰다.
일제 강점기인 1932년 LA올림픽에 조선 출신 육상 선수인 황을수, 권태하, 김은배가 일장기를 달고 처음으로 올림픽에 참가했다. 김은배는 마라톤에서 6위에 입상하기도 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선 마라톤 손기정이 조선인으로는 사상 처음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일본국적으로 나가서 딴 올림픽 금메달이었지만 손기정의 마라톤 우승소식은 식민지 조선인들에게는 한없는 기쁨과 희망이었다. 손기정이 마라톤 우승을 차지한 뒤 동아일보는 그의 옷에 새겨진 일장기를 말소해 신문에 보도했다. 이른바 ‘손기정의 일장기 말소사건’이었다.
1945년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대한민국은 1948년 8월 정부 수립이전인 7월 런던올림픽에서 첫 올림픽에 출전했다. 역도 김성집, 복싱 한수안이 동메달 2개를 획득한 런던올림픽에서 손기정이 선수단 기수로 참가했다. 이후 매번 올림픽에 출전한 한국은 1976년 몬트리올 대회에서 레슬링 양정모가 건국 이후 첫 올림픽 금메달을 따냈다. 올림픽 출전이후 28년 만이다. 1981년 서독 바덴바덴 IOC 총회에서 1988년 서울올림픽을 유치하는데 성공한 한국은 서울올림픽에 미국과 소련이 참가하며 동서화합의 장으로 만들어 세계 평화에 이바지했다. 한국은 서울올림픽 이후 세계 10대 스포츠 강국으로 자리잡으며 세계스포츠의 성공 모델이 됐다.
[올림픽 특집] 한일스포츠, 라이벌 대결과 克日
1. 한일스포츠의 탄생, 애국과 문명화
2. ‘일본에 질 수 없다- 역대 올림픽서 나타난 반일 감정
3. 손기정과 일장기 말소사건
4. 남녀배구 한일전
5. 마라톤 한일전
6. 축구 한일전
7. 야구 한일전
8. 유도 한일전
9. 한·일스포츠 속의 양국 지도자
10. 진정한 극일, 승패보단 스포츠 정신
[김학수 마니아타임즈 편집국장 kimbundang@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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