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체육 100년100인100장면] 38. “권투 해서 일본인 맘껏 패라”-몽양 여운형](https://cgeimage.commutil.kr/phpwas/restmb_allidxmake.php?pp=002&idx=3&simg=20201102064103041378f6b75216b21121740159.jpg&nmt=19)
독립운동가이며 민족지도자인 몽양 여운형은 한국 체육의 선구자로 ‘그답지 않게’ “권투 해서 일본인 맘껏 패라”며 조선청년들을 자극했다.
몽양 여운형이 권투에 빗대 조선청년들을 자극한 대로 일본선수와 벌인 권투 경기에는 수많은 조선인들이 몰려들었다. 권투선수들은 울분의 주먹을 날렸고 조선인들은 조선선수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며 쌓인 한을 녹였다.
일본인 킬러의 대표적인 조선 권투선수는 황을수, 이규환, 서정권 등. 이들은 일본 선수에게 패한 적이 없었다. 황을수는 1929년 전 일본아마추어선수권대회 라이트급 최강자로 올라 선 후 3회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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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을수는 조선인 최초의 올림픽 출전자였다. 1932년 LA올림픽 라이트급 대표선발전에서 시원한 권투로 일본선수들을 모두 물리치고 올림픽에 나섰다. 그러나 올림픽에선 대전운이 따르지 않았다. 우승후보였던 독일의 카르츠를 1회전에서 만나는 바람에 첫 경기에서 탈락했다. 황을수는 한국전쟁 후 월북하여 공훈체육인 칭호를 받는 등 조선올림픽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황을수의 뒤를 이어 다시 올림픽에 나선 조선인 권투선수는 이규환이었다. 그도 주먹으로 민족의 아픔을 달랬으나 손기정과 함께 나간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선 1회전에서 탈락했다.
주먹으로 일본을 평정한 대표적인 복서는 서정권. 황을수에게 권투를 배우기도 했던 서정권은 아마추어 최강자로 1930년 전일본대회 결승에서 일본 최고의 주먹이었던 고토히로를 1회 KO로 끝냈고 일본의 우상이라고 했던 후리구치마저 4회 KO로 보내 ‘복싱의 신’으로 불렸다.
그의 주먹은 일본선수를 만나면 더욱 불을 뿜었다. 호남 부호의 아들로 모자람이 없었던 그가 권투를 배우게 된 것도 얄미운 일본인을 마음껏 패주고 싶어서였다. 아마추어에서 적수를 찾을 수 없었던 서정권은 1931년 4월 프로로 전향했다.
일본 권투계는 조선 신인선수의 기를 꺾기위해 그의 데뷔전에 경량급 최강자인 가시와무라 고로를 내세웠다. 그러나 고로는 싸울 새도 없이 1회 1분만에 나가 떨어졌다. 서정권은 1년간 일본선수 상대로 27전 27전승 11KO를 기록, 일본 권투계를 완전히 평정했다.
일본 선수 누구도 서정권과 싸우려 하지 않자 서정권은 세계챔피언 타이틀을 목표로 미국원정전에 나섰다. 그곳에서의 링네임은 ‘코리아 조’였다. 조선인 서(徐)이지만 서의 일본 발음 조를 가져다 붙인 것인데 미국인 매니저가 서정권이 조선인임을 알고 코리아를 붙여줬다.
서정권은 미국 원정 첫 경기를 RSC승으로 끝내는 등 3연속 KO승을 거두며 돌풍을 일으켰으나 챔피언이 되지는 못했다.
일본의 한 기자는 그러한 조선의 권투경기장면을 이렇게 표현했다.
‘조선 선수들이 주먹 힘을 키우는 것은 불리한 판정을 받지 않고 KO로 끝내려는 의도도 있지만 조선인 앞에서 공공연히 일본 선수들을 두들겨 패서 코피를 흘리도록 만들고 쓰러질 때 까지 때려주는데 목적이 있다.’
권투 붐에 일조한 여운형은 ‘한국 체육의 아버지’. YMCA 야구단을 이끌고 일본 원정에 나서기도 했고 대학야구선수로 활동했으며 상하이 야구팀에선 코치를 하기도 했다. 영화 ‘YMCA 야구단’의 실제 모델로 배우 송강호가 연기한 이호창이 몽양이다.
3.1운동 직후 중국으로 망명한 몽양은 독립운동을 하는 한편 상하이 한인 체육회를 조직했고 푸단대학교 명예교수로 대학축구팀을 이끌고 싱가포르, 필리핀 원정경기를 한 적도 있다.
1929년 일본에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하다가 1932년 가출옥한 그는 나중에 조선체육회 회장이 되었지만 그 당시 이미 조선체육회 이사, 조선축구협회, 조선농구협회, 조선씨름협회 회장을 맡았다.
몽양은 체육을 독립운동의 한 방편으로 활용했다. 1934년 제2회 조선 풀마라손 대회위원장으로 대회 우승자인 손기정을 발굴, 육성했으며 손기정의 가슴에 일장기를 지운 최초의 신문인 조선중앙일보도 그가 사장으로 있던 신문이었다.
몽양은 손기정을 특별히 아끼며 후원했는데 손기정 등 조선인 올림픽 출전자들에게 “여러분은 비록 가슴에는 일장기를 달고 있지만 등에는 한반도를 짊어지고 있다는 것을 잊어선 안된다”며 격려했다.
그러면서 또 말했다.
“조선 사람을 죽일 수는 있지만 조선 민족은 없애지 못한다. 나의 목을 일초에 벨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2천만 명의 혼까지 죽일수는 없을 것이고 나의 마음까지 벨수는 벨 수는 없을 것이다. 잘 싸워라. 싸워서 꼭 이겨라, 이 나라는 어두워도 가슴속에서 광명을 안아라. 역사는 공정하게 심판할 것이다“
광복 후 조선체육회 초대회장과 조선올림픽위원회 초대위원장으로 뽑힌 몽양은 그의 이름으로 1947년 6월 IOC에 가입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올림픽인 런던올림픽 출전을 독려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전임에도 런던 올림픽에 태극기를 앞세울 수 있었던 것도 그의 노력 덕분이었다.
[이신재 마니아리포트 기자/20manc@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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