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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아스토리]차범근을 넘어설 일본선수는 없다-갈색폭격기 독일에 뜨다.

2020-06-08 11:00

일본 국가대표 출신 미드필더 하세베 마코토(36·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가 지난 6일 309경기에 출전, 차범근의 독일프로축구 분데스리가 아시아 선수 역대 최다 출전 기록인 308경기를 넘어섰으나 ‘차범근의 위업’을 넘어선 것은 아니다.

차범근 전 감독은 1978년 SV 다름슈타트를 시작으로 프랑크푸르트, 바이어 레버쿠젠을 거쳐 1989년 은퇴까지 분데스리가에서만 308경기에 출전해 98골을 남겼다. 하세베는 2007년 볼프스부르크에서 시작, 2008년 4월 27일 첫 골을 기록했으나 그가 뛴 309경기에서 기록한 골은 한자리 수에 불과하다.

하베스가 2021년까지 계약, 출장기록은 계속 이어가더라도 차범근의 분데스리가 위용은 결코 넘어설 수 없다.

[마니아스토리]차범근을 넘어설 일본선수는 없다-갈색폭격기 독일에 뜨다.


* 갈색 폭격기 독일에 뜨다

차범근은 월등했다. 22명이 엉켜 뛰는 축구장에서도 그의 존재는 늘 한눈에 들어왔다. 흔히 폭발적이라는 표현을 쓰곤 하는데 한창 시절 차범근이 공을 잡고 치고 나가는 순간을 보면 정말 폭발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차범근은 그래서 축구 변방에서 세계의 중앙무대로 단숨에 뛰어갈 수 있었다.

차범근이 해외진출의 문을 두드린 것은 1978년. 프로축구의 개념도 익숙치 못했던 때였고 리그 이름도 생소했던 독일의 분데스리가였다. 그것이 세계축구를 논하는 5대 리그의 하나인 줄을 당시엔 알지 못했다.

좋은 기회였으나 축구계와 일부 체육인들은 우수자원을 빼앗기는 것으로 생각하며 차범근의 독일 진출을 반대했다. 폐쇄적인 접근이었지만 한편으론 이해되는 것이 차범근은 당시 대체선수를 찾을 수 없는 출중한 국가대표 스트라이커였다.

그의 존재감이 확실하게 드러난 것은 1976년 박스컵 축구 말레이시아전. 경기 종료 7분 전까지 1-4로 지고 있어 경기를 지켜보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이 터무니없는 패전에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 차범근이 있었다. 그는 그 짧은 순간 3골을 몰아넣어 순식간에 경기를 무승부로 만들었다.

그러나 차범근 본인이나 언론 등 여론은 달랐다. 차범근의 진출을 통해 선진 축구를 보고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실제로 차범근은 독일에서 뛰고 있던 1986년 월드컵에 대한민국 국가대표로 차출되어 본선무대에 출전하기도 했고 돌아와선 국내에 선진축구를 접목시켜 대한민국 축구발전에 이바지했다.

축구계 일부의 단편적인 생각보다는 전체를 고려하는 여론덕분에 차범근은 방콕 아시안게임을 남북공동우승으로 마치고 독일로 향해 SV 다름슈타트(1978~1979)와 입단 계약을 체결했다. ‘아시아의 표범’이 ‘갈색 폭격기’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차범근은 낯선 땅에서 갑자기 하게 된 첫 경기에서 2개의 어시스트로 팀의 3-1 승리를 이끌었다. 현지의 ‘빌트’지는 차범근을 ‘다름슈타트의 비밀무기, 아시아의 가장 훌륭한 공격수’라고 극찬했고 하고 한 TV에선 15분짜리 특집방송을 내 보낼 정도였다.

장래가 보장되는 멋진 데뷔전이었다. 하지만 차범근은 그 한 게임만 뛰고 바로 돌아왔다. 입대 전 해병대와 똑같이 제대시켜 주겠다며 그를 ‘모셔갔던 공군’이 막상 제대할 때가 되자 전역을 시키지 않았다.

차범근은 할 수 없이 군 생활을 더했고 그해 12월이 아니라 1979년 5월말이 되어서야 군복을 벗을 수 있었다. 마침내 해외진출의 모든 조건을 충족시킨 차범근은 다시 독일로 가 프랑크푸르트 팀에 몸을 얹었고 첫 시즌에 공격수 부문 3위에 랭크되었다.

성공적인 첫 시즌. 차범근의 성공시대가 바로 열리는 듯 했으나 80-81 시즌은 부상 등으로 다소 부진했다. 27 경기 8골 이었다. 그러나 DFB-포칼 6경기에서 6골을 넣어 팀의 세 번째 포칼 우승을 이끌었다.

한순간의 어려움이 있었지만 차범근은 이내 다시 살아났다. 81-82 시즌 리그 31경기에서 11골을 넣었고 82-83 시즌엔 리그 33경기에서 15골을 기록했다.

어느 새 팀의 고액연봉자가 된 차범근은 1983년 바이어 레버쿠젠으로 자리를 옮겼다. 레버쿠젠은 당시 분데스리가 중하위팀으로 18개팀중 12위권을 오갔다. 한때 16위까지 떨어지기도 했지만 차범근의 가세로 중상위권까지 뛰어올랐다.

레버쿠젠에서의 첫 시즌을 35경기 12골로 마감한 차범근은 이듬해 32경기 14골, 그리고 85-86시즌 독일에서의 한 시즌 최다골인 38경기 19골(리그 34경기 17골)을 터뜨렸다.

차범근은 86-87시즌부터 미드필더로 포지션이 변경되어 기본적으로 골을 넣을 확률이 줄어들었지만 만 36세가 되는 1989년까지 E. 프랑크푸르트(1979~1983), 바이어 레버쿠젠(1983~1989) 등에서 12년간 총 308경기에 출장, 98골을 넣었다.

DFB-포칼이나 UEFA 컵 기록까지 포함하면 372경기 121골이다. 차범근의 분데스리가 98골은 당시까진 분데스리가 외국인 최다 골 기록이었다.

지구촌에 코리아의 존재가 미미했던 시절, 차범근은 나라의 민간외교사절로 대한민국을 폭넓게 알리는 역할까지 했다. 처음 동양계 축구선수를 벽안시했던 독일인들은 차범근이 보여준 엄청난 스피드와 주파력에 환호를 보냈고 독일 언론에서도 그를 ‘차붐’이라고 부르며 동양 최고의 선수임을 확인해 주었다.

[이신재 마니아리포트 기자/news@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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