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반전의 열쇠는 ‘얼마나 긴장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적당히 긴장했는가’에 있다. 뇌과학에는 여키스-도슨 법칙이라는 개념이 있다. 자동차 알피엠 게이지를 떠올리면 쉽다. 알피엠이 너무 낮으면 힘이 안 붙고, 너무 높으면 엔진이 헛돈다. 사람의 각성 수준도 똑같다. 지나치게 이완돼도, 지나치게 긴장해도 손끝의 감각과 판단은 흐트러지고 딱 적당한 지점에서만 최고의 퍼포먼스가 나온다. 면접 마지막 질문에서 긴장이 풀려 헛말이 나오거나, 반대로 너무 긴장한 나머지 아는 답도 못 하는 경우와 같은 이치다.
여기에는 뇌의 위협 탐지 회로도 관여한다. 이 회로는 ‘안전하다’는 신호가 들어오면 곧바로 경계 태세를 낮추도록 설계돼 있다. 진화적으로는 합리적인 전략이다. 사방이 안전할 때조차 늘 최고 각성 상태를 유지한다면 몸이 먼저 지쳐 버리기 때문이다. 문제는 스포츠에서는 이 전략이 종종 독이 된다는 점이다.
9회말 마운드에 오른 기아 투수들의 뇌는 ‘이미 다 이긴 경기’라는 안도감 앞에서 알피엠이 뚝 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근육의 미세한 힘 조절, 공 하나의 실밥을 채는 감각까지 무뎌지는 순간이다. 반대로 밑질 것 없는 처지의 키움 타자들에게는 잡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궁지가 만들어낸 역설적인 집중력, 벼랑 끝에서 오히려 선명해지는 시야였다. 실시간 승리 확률은 이닝과 점수 차, 잔루 상황을 계산한 통계적 추정치일 뿐, 이런 선수 개개인의 뇌 상태까지는 읽어내지 못한다. 그 사각지대에서 이번 역전극이 벌어졌다.
경기 초반은 팽팽했지만 기아가 멀리 달아났다. 키움은 3회 데이비슨의 투런 홈런으로 2대2 균형을 맞췄지만, 기아는 6회 2사 후 김태군의 2루타와 김호령의 안타로 만든 찬스에서 박재현이 싹쓸이 3루타를 터뜨리며 4대2로 벌어졌다. 8회에는 김태군의 시즌 5호 투런 홈런에 박재현과 김선빈의 연속 안타가 겹치며 스코어는 7대2로 승리를 눈앞에 두었다.

그런데 승부는 9회말에 갈렸다. 기아는 5점 차를 지키러 이태양을 올렸지만 권혁빈의 안타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대타 이형종이 뜬공으로 물러나며 키움의 승리 확률이 0.8%까지 떨어진 순간, 서건창과 추재현이 연속 안타로 1사 만루를 만들었다.
다급해진 기아는 좌완 마무리 이의리를 투입했지만, 키움 데이비슨의 2타점 적시타로 순식간에 7대4까지 좁혀졌다. 승부의 무게 중심이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2사 만루, 타석에 들어선 키움의 베테랑 포수 김재현이 이의리의 공을 받아쳐 좌측 담장을 넘기는 끝내기 만루 홈런을 만들어냈다. 2022년 5월 25일 잠실 LG전 이후 1,551일 만에 터진 개인 통산 8호포이자, KBO 역대 26번째 끝내기 만루 홈런이었다.
이 하루가 남긴 사자성어는 두 개다. 기아에게는 천려일실(千慮一失),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천 번을 헤아리다 보면 그중 한 번은 실수가 있기 마련이라는 뜻이다. 초한 시대, 한나라 장수 한신에게 사로잡힌 조나라 책사 이좌거가 스스로를 낮추며 건넨 말에서 비롯됐다. 6이닝을 완벽하게 틀어막은 선발 투수의 공도, 마지막 이닝의 실투 하나 앞에서는 무력해진다.
반대로 키움에게는 구사일생(九死一生), 아홉 번 죽을 고비를 넘겨 겨우 한 번 살아났다는 뜻이다. 전국시대 초나라 시인 굴원이 유배지에서 남긴 글 '이소'의 한 구절, "아홉 번 죽는다 해도 후회하지 않으리"에서 비롯된 말이다. 0.8%라는 숫자는 통계가 아니라, 마지막까지 배트를 놓지 않은 타석 하나하나가 쌓아 만든 결과였다.
승부는 승리 확률이 98.8%를 가리킬 때가 아니라, 마지막 공 하나가 손을 떠날 때 끝난다. 이기고 있다는 안도감이 오히려 위험 신호일 수 있고 벼랑 끝이 때로는 가장 선명한 시야를 만들어주었다. 8회까지의 스코어보다 9회 2아웃 이후의 한 타석이 더 많은 것을 말해준 밤이었다. 어제 고척돔이 남긴 두 개의 교훈이다.
[김기철 마니아타임즈 기자 / maniarepor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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