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3.1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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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철의 레저이야기] 10-0, 뇌는 이 숫자를 어떻게 기억하는가?

권토중래(捲土重來) - 흙먼지를 말아 올리며 돌아오는 법에 대하여

2026-03-16 09:58

한국 0-10 완패…WBC 4강행 좌절. 사진=연합뉴스
한국 0-10 완패…WBC 4강행 좌절. 사진=연합뉴스
경기가 시작되고 한 시간 30분 정도 됐을까. 일정이 있어서 경기를 다 챙겨볼 수 없었다. 도미니카공화국 타선이 한국 마운드를 차례로 무너뜨렸다. 2회에 3점, 3회에 4점을 내주며 이미 흐름은 기울었다. 어쩔 수 없이 7회 끝내기 3점 홈런은 하이라이트를 통해 보았다. 경기는 그렇게 끝나 있었다.

7이닝 콜드게임. 스코어보드의 숫자는 냉정했다. 10-0.

결과를 알고 있었지만 끝까지 챙겨봐야 할 것 같은 묘한 의무감이 있었다. 야구팬이라면 누구나 알 그 기묘한 감정이었다. 경기가 끝나고 덕아웃으로 들어가는 선수들의 뒷모습만 눈에 남았다.

이런 숫자를 마주할 때 우리 뇌에서는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질까.

가장 먼저 움직이는 것은 편도체, 말하자면 '감정의 경보기'다. 충격적인 자극이 들어오면 편도체는 0.02초 만에 경보를 울린다. 전전두엽, 즉 ‘이성의 사령탑'이 상황을 분석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한다. 스트레스 호르몬 코르티솔이 분비되고, 심박수가 오른다. 채널을 돌리고 싶은 충동과 그래도 끝까지 봐야 한다는 의무감이 동시에 치고 올라오는 것, 그것도 편도체가 과부하 상태이기 때문이다. 패배의 장면을 외면하고 싶으면서도 자꾸 눈이 화면으로 향하는 이 모순된 행동, 뇌과학은 그것을 '감정 처리의 충돌'이라고 부른다.

10-0이라는 숫자는 그저 야구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야구 경기를 시청한 수 많은 사람들의 뇌에 동시에 새겨진 감정의 각인이다. 같은 화면 앞에서 같은 감정을 공유하는 이 집단적 경험, 뇌과학자들은 이것을 ’집합적 흥분'이라 부른다. 이기면 함께 뜨겁고, 지면 함께 차갑다. 수 많은 팬들이 한국 야구를 놓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다.

그런데 흥미로운 일이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뇌과학에는 '감정적 각인이 강할수록 기억도 깊어진다'는 원리가 있다. 편도체가 강하게 반응한 사건일수록 해마, 즉 '뇌의 기억 저장소'에 더 또렷이 새겨진다. 평범한 승리보다 뼈아픈 패배가 더 오래 남는 이유다.

2006년 WBC 1회 대회 준우승의 감격보다, 이후 대회에서 반복된 탈락의 쓴맛이 더 진하게 기억되는 것처럼 3월 14일 아침 그 10-0은 어쩌면 한국 야구 팬들의 뇌에 수십 년이 지나도 선명하게 남을 숫자가 될지 모른다.

고통은 기억이 된다. 그리고 기억은 동기가 된다.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은 초패왕 항우의 마지막을 시에 담으며 이렇게 읊었다. "강동의 자제들 중에 영웅이 많으니, 권토중래하면 승부는 알 수 없다(江東子弟多才俊 捲土重來未可知)." 흙먼지를 말아 올리며 다시 돌아온다. 권토중래(捲土重來). 항우는 패배 앞에 스스로 무릎을 꿇었지만, 두목이 역사에 던진 질문은 살아남았다.


만약 그가 돌아왔다면 어땠을까.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났다면, 그 결말은 달라졌을지 모른다고. 한국 야구에도 똑같은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이번 대회에서 한국은 예선부터 흔들렸다. 일본에 지고, 대만에 지고, 가까스로 호주를 꺾고 2위로 8강에 올랐다. 그리고 세계 최강 도미니카공화국의 화력 앞에 7이닝 만에 2026 WBC를 마쳤다.

아프다. 그러나 뇌는 단선적으로 기억하지 않는다. 10-0의 충격 뒤에도, 우리는 마지막 이닝까지 마운드를 지키던 투수의 뒷모습을, 덕아웃에서 서로를 다독이던 눈빛을 함께 저장한다.

기억은 숫자만이 아니라 그 장면 전체를 품는다.

여기서 뇌의 또 다른 능력이 등장한다. 신경 가소성, '뇌의 리모델링 능력'이다. 뇌는 고통스러운 경험일수록 더 강한 회로를 새로 짠다. 깊이 패인 상처 위에 더 두꺼운 신경망이 생긴다. 운동선수들이 가장 치욕스러운 패배 이후 가장 극적인 성장을 이룬다는 것은 스포츠 심리학이 반복해서 확인해온 사실이다. 개인도 마찬가지지만, 팀 전체가 그 감정을 공유했을 때 그 효과는 배가된다.

오늘의 쓰라림이 클수록, 3년 뒤 마운드에 오를 젊은 투수의 손끝은 더 날카로울 것이다. 어딘가에서 오늘 이 경기를 중계 화면으로, 혹은 스마트폰으로 지켜본 열여섯, 열일곱 살 아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 아이들의 편도체에 지금 무언가가 또렷이 새겨지고 있다.

권토중래, 흙먼지를 말아 올리며 돌아오는 것. 그건 결국 오늘의 10-0을 어떻게 간직하느냐에 달려 있다.

뇌는 고통도 연료로 쓸 줄 안다. 문제는 그 연료를 태울 엔진을 어떻게 다듬느냐다. 2029년 WBC의 마운드, 그 위에 오를 얼굴들은 어딘가에서 이 숫자를 가슴에 새기고 있을 것이다. 그 아이들이 흙먼지를 말아 올리는 날, 우리는 다시 모여 응원할 것이다.

[김기철 마니아타임즈 기자 / maniarepor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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