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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박사 기자의 스포츠용어 산책 1569] 북한에선 왜 ‘김일성경기장’이라 말할까

2025-10-09 07:06

 북한 김일성경기장 모습
북한 김일성경기장 모습
북한의 ‘김일성경기장’은 평양의 심장부, 대동강이 휘감은 모란봉 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경기장 옆에는 김일성의 독립운동 업적을 선전하기 위해 만든 개선문이 있다. 김일성 우상화와 관련한 기념물이 나란히 있는 셈이다.

김일성경기장의 뿌리는 일제강점기 때의 ‘평양 공설운동장’이다. 1926년 평양부청 주도로 건설됐으며,

초기 ‘기림리공설운동장(箕林里公設運動場)’으로 불렸다. 일제 시대 전조선축구대회, 경평전을 비롯한 각종 스포츠 행사가 열렸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 따르면 조선일보 1925년 5월17일자 ‘평양공설운동장(平壤公設運動場) 위치문제(位置問題)로청원(請願)’ 기사는 ‘평양공설운동장(平壤公設運動塲)은 대안선교리(對岸船橋里)에 설치(設置)하랴고 하얏던바 춘계경매대회(春季竸罵大會)가튼 운동(運動)에는 사진(沙塵)이 표양(飄揚)할 염려(念慮)가 잇슴으로 부내모모유지(府內某某有志)는기자날인(記者捺印)하야 기림리종묘장(箕林里種苗塲)을 매입(買入)하야 공설운동장(公設運動塲)을 작(作)케하기를 송정부윤(松井府尹)에게 청원(請願)하얏다는데 기림리리민(箕林里里民)은 종묘장(種苗塲)을 운동장(運動塲)으로 사용(使用)케되는 경우(境遇)에는 그대등(對等)되는 토지(土地)를 기부(寄付)하야 종묘장(種苗塲)으로 쓰게하겟다는 갈망(渴望)이 간절(懇切)하다더라 (평양(平壤)’고 전했다. 당시 기사는 기림리 종묘장을 평양 유지들이 매입, 기부해 평양 공설운동장 건립이 추진됐다는 내용이었다.

해방 후 북한은 이 공간을 접수해 ‘평양시민경기장’으로 개칭했다. 1969년 증축을 한 뒤, 이때부터 모란봉경기장(牡丹峰競技場)’으로 불렸지만, 1982년 4월 다시 한번 개축을 하면서 김일성의 70번째 생일을 기념하여 명칭도 ‘김일성경기장’으로 개명됐다. 수용 인원은 약 5만명으로, 당시로서는 아시아에서도 손꼽히는 규모였다.

건물 외형은 전통 궁궐 지붕 형태와 현대식 철근콘크리트 구조를 결합한 모양이다. 좌석 배치는 모란봉과 대동강을 조망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평양의 “혁명성지”와 조화를 이루는 공간으로 설정했다. 내부에는 김일성 동상, 혁명사적관, VIP용 연회실 등이 마련되어 단순한 경기장이 아니라 ‘혁명 기념 공간’으로 쓰이고 있기도 하다.

김일성경기장은 북한 체육의 모든 상징적 장면의 무대이다. 만경대상 체육대회, 4·25체육단 경기, 인민체육대회가 이곳에서 열렸고, 때로는 집단체조 ‘아리랑’의 웅장한 무대가 되기도 했다. 김일성 사망 1주기에는 ‘백두의 칼바람 체육행사’가 펼쳐지며 집단적 애도의 공간으로 기능했다. 필자가 1991년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 남북 단일팀 구성을 위한 북한 경기 취재차 갔을 때, 김일성경기장은 북한을 선전하는 대형 매스게임을 선보이는 장소로 쓰였고, 5·1경기장에선 남북한 친선 경기가 열렸다. (본 코너 1568회 '북한에선 왜 ‘5·1경기장’이라 말할까' 참조)
김일성경기장은 북한 남녀 축구대표팀의 홈구장으로 A매치와 같은 많은 국가대표팀 경기가 개최됐다. 특히 김일성경기장에서 북한 축구 국가대표팀은 2005년 3월에 열린 이란 대표팀과의 월드컵 예선전 패배 이전까지 단 한번도 패배하지 않은 기록을 갖고 있어 ‘원정팀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 김일성경기장은 여전히 평양 시민마라톤의 출발점이며, 대형 LED 전광판과 방송 시스템이 더해진 ‘현대화된 성지’로 남아 있다.

[김학수 마니아타임즈 기자 / kimbundang@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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