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에 반해 당시 화순고의 4번 타자 겸 포수로서 유명세를 탔던 신진호는 일찌감치 자신을 눈여겨본 캔자스시티 로열스와 계약을 맺으며 미국행을 선언했다. 그런데 당시 계약 조건이 꽤 파격적이었다. 계약금 60만 달러에 해당되는 세금은 모두 구단에서 부담하는 것이 그 첫 번째였고, 모교(화순고)에 대한 야구 용품 지원과 1년 후 화순고 후배 중 한 명에게 입단 테스트 기회를 주는 것이 그 두 번째였다. 하지만, 이보다 더 파격적인 조건은 따로 있었다. 바로 메이저리그 극동 스카우트를 최대 7년간 신진호와 같이 머물게 하면서 주거지를 따로 마련해 주는 조건이었다. 투수와 이야기를 많이 나누어야 하는 포수 특성상, 영어를 빨리 배우는 것도 신진호에게 중요했다. 따라서 한국어와 영어가 가능한 스태프의 존재는 신진호에게 ‘현지 적응’이라는 측면에서 도움이 될 만했다.
이렇게 좋은 조건을 바탕으로 미국땅을 밟았던 신진호.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미국에서의 생활을 더 들어보고자 한다.
한국인 스태프 NO! ‘바닥부터 시작한’ 신진호의 좌충우돌 미국 이야기
- 그렇게 고교 생활을 마무리하고, 미국 땅을 밟게 됐다. 루키리그부터 시작하지 않았나?
신진호(이하 ‘신’) : (고개를 끄덕이며) 그랬다. 애리조나 루키리그에서부터 시작했다. 그런데 첫 해에는 정말 적응이 안 되더라. 나는 잘하려고 여기(미국)에 왔는데, 생각보다 잘 안 되는 나를 발견했다. 가장 힘든 것은 영어였다. 포수라서 투수와 대화를 많이 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통역을 두고 대화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하루 6시간 이상 영어를 공부해도 잘 안 되더라. 그래서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 무슨 조치를 취했는가?
신 : 입단하고 1년 만에 구단에, ‘아, 저 극동 스카우트와 안 살아도 됩니다. 저 스스로 부딪히면서 영어 배우겠습니다.’라고 통보했다(웃음). 어찌 보면 무모했다.
- 보통 결심 아니면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계약 조건에 최대 7년까지 한국인 스태프(극동 스카우트)와 동행한다고 되어 있지 않았나?
신 : 그랬다. 하지만, 포수에게 투수와의 대화는 필수적이고, 언젠가는 스스로 영어를 깨우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왕 할 바에야 아예 맨바닥에 부딪히면서 영어 배워 보자!’, ‘영어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 번 해 보자!’라는 마음으로 덤벼 들었다.
- 박찬호 역시 입단 직후 마이너리그로 강등되었다가 비슷한 일을 겪은 바 있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대선수가 되지 않았는가.
신 : 참 신기할 노릇이다. 1, 2년차 때까지 들리지 않던 영어가 3년차부터 들리기 시작하더라(웃음). 죽어라 노력한 결과가 빛을 발한 결과였다. 영어가 들리니, 승격도 순조로웠다. 3년 차에는 싱글 A에 진입할 수 있었다.
- 싱글 A에서 조금만 더 하면, 포수라는 특성상 더블 A 승격도 어렵지 않을 수 있었다.
신 : 그런데 그게 또 마음대로 안 되더라. 3년 차에 타격을 하다가 파울을 쳤는데, 그게 공교롭게도 내 무릎에 맞았다. 결국, 그 해에 파이널리그를 끝으로 시즌을 마쳤다. 부상의 시작이었다. 4년차에도 싱글 A에서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정말 방망이가 안 맞았다. 사실 고교 시절에는 ‘아무 생각 없이’ 마음 편히 치다 보니 잘 맞았는데, 미국에서는 그게 또 잘 안 되더라. 잘 맞지 않다 보니 쓸데없는 생각이 많아졌고, 생각이 많아지니 ‘맞아야 할 방망이’가 제대로 맞지 않았다. 그래서 깨달았다. 야구라는 것이 별거인가. 공을 방망이에 갖다 맞추기만 되는 것 아닌가. 때로는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타격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 결국, 작년에 스스로 방출을 요청한 것으로 안다. 공교롭게도 팀을 떠난 이후 캔자스시티가 월드시리즈에 올랐다.
신 : 요다노 벤츄라, 브루스 첸(이상 투수)이 한솥밥을 먹었던 동료였고, 또 상당히 친했다(주 : 실제로 브루스 첸은 신진호에 대해 ‘빅리그에서도 성공할 수 있는 포수’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은 바 있다). 작년 5월에 귀국했는데, 귀국 이후 SNS 계정도 끊고 혼자 있고 싶어 여행도 떠났다. 야구를 계속 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많았는데, 그것을 결정하기까지 그다지 긴 시간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다. ‘진호야, 너 뭐하니? 야구 해야지!’ 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래서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운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거울을 보고 나니, 와... 이건 정말 장난이 아니더라. 몸이 불어 있는 나를 발견했다. 한창 좋았을 때의 몸이 아니었다. 그 순간 ‘이건 야구 선수로서 정말 심각하다.’라고 느꼈다. 그래서 바로 살을 뺐고, 운동에 열중했다. 지금 100kg을 유지하고 있는데, 두 자릿 수로 만들어 보이겠다.
- 세한대 이동석 감독님은 신진호 본인에게 훈련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고, 10년 넘게 학부형 회장을 해 오신 아버님도 참 고생이 많으셨을 듯 싶다.
신 : (공감한다는 듯) 정말 그렇다. 사실 귀국하고 나서 아버지께서 많은 힘을 주셨다. 한때 야구를 계속해야 할지 말지 고민할 때 아버지께서 “이놈아, 네가 야구하는 데 왜 남의 눈치를 보냐? 야구를 하는 것은 너 아니냐?”라고 따끔하게 한 마디 해 주셨다. 정말 맞는 말씀 아닌가! 그때 남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나에게는 야구 선수보다 존경하는 분이 바로 아버지다. 정말 아버지는 대단하신 분이고, 또 내 인생의 ‘넘버 원’ 이다. 그리고 어머니가 안 계신 자리를 누나가 정말 잘 채워줬다. 장녀라는 책임감 때문에 본인 하고 싶은 것 못 하고 형과 나로 인해서 고생이 많았다.
- 그래, 이제 다시 운동을 시작한 만큼 신인지명 회의날짜를 기다려야 하지 않겠는가?
신 : 2014년 5월에 돌아왔으니, 2년 유예 규정을 감안하면 내년 드래프트에 지명 후보자로 나설 수 있다.
- 드래프트까지 아직 1년 이상 남았지만, 본인에 대한 어필을 좀 해 달라.
신 : 미국에서 아팠던 무릎도 이제는 많이 좋아졌다. 몸 상태는 일단 최상이다. 또한, 포수로서 자신 있게 경기에 임할 수 있다는 점이 나의 큰 장점이라 생각한다. 다른 것은 몰라도 ‘잡는 것’ 만큼은 자신 있다. 투수가 던지는 ‘공’ 이든, 루상에 나간 ‘주자’든 이 어깨로 모두 잡을 수 있다. 또한, 미국에서 문화, 언어, 야구를 두루 배워 왔다는 점도 어필해 보고 싶다.
- 이른 질문일지는 모르겠지만, 특별히 가고 싶은 구단은 있는가?
신 : 지명만 해 주신다면, 어느 구단이든 상관없다. 포수라는 자리는 결국 ‘기다리다 보면 기회가 오게’ 되어 있다. 힘들지만, 포수만큼 안정적인 포지션도 사실 없다. 어디로 가든지 선배들과 함께 야구를 하고 싶다. 이왕이면 한화처럼 ‘죽었다!’라고 생각하고 훈련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된 구단이었으면 좋겠다(웃음).
- 마지막 질문이다. 한국 프로야구에서 이루고 싶은 ‘꿈’이 있는가?
신 : 두 가지다. 하나는 정말로 ‘안 다치고’ 건강하게, 그리고 꾸준히 야구하고 싶다. 이국 땅에서 다쳐 보니, 건강한 몸 상태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나머지 하나는 프로 입문의 길이 허락된다면, 신인왕에 도전해 보고 싶다. 그런 날이 올 때까지 최선을 다하겠다. 지켜봐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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