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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스포츠 100년](55)이길용 기자의 일장기 삭제 의거①언론인의 표상인 이길용 기자는?

2020-12-22 10:04

파하라는 필명으로 주로 활동했던 1930년대 동아일보 사회부 운동부 주임으로 활동하던 시절의 이길용 기자
파하라는 필명으로 주로 활동했던 1930년대 동아일보 사회부 운동부 주임으로 활동하던 시절의 이길용 기자
"언론인의 표상인 이길용 기자를 아시나요?”

이길용 기자는 1920년대와 1930년대 동아일보~조선일보~동아일보에서 사회부 체육 담당 기자로 활동하면서 조선 체육의 발전을 위해 온 몸을 불살랐던 대표적인 언론인이자 체육 행정가였으며 독립운동가였다.

무엇보다 그는 서슬 시퍼런 일제 치하에서 일장기를 두 번이나 말소하는 의거로 조선의 민족혼을 일깨운 진정한 언론인의 표상이자 또한 스포츠 영웅이었다.

남달랐던 배짱과 의기
조선의 국권이 외세에 흔들리기 시작하던 1899년 9월 9일 추석날에 마산에서 태어난 이길용은 철이 들기 시작하면서 아버지(이치상)를 따라 인천으로 이사를 와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가학(家學)으로 한문을 배우고 인천 영화소학교를 거쳐 서울로 통학을 하며 배재고보 본과 8회생으로 졸업한 그는 욕심에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에 있는 도시샤(同志社) 대학에 입학했으나 부모의 권유로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2년 만에 조선에 돌아왔다. 이때가 3·1 운동이 일어나기 한해 전인 1918년이었다.


이길용은 조선과 만주를 오가는 철도국에서 첫 직장생활을 하면서 상해임시정부의 비밀문서 운송을 하다 일제에 검거돼 3·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의 민족지도자들 가운데서도 요인급과 같은 3년 실형을 받으며 파란만장한 삶의 서곡을 열었다.

그리고 그는 잠시 모교인 인천 영화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했다. 기록에는 없지만 당시 영화학교 4학년인 최영업이 ‘야구 인천의 걸음마 시작은 이길용 씨의 공로’(1955년 9월 26일, 주간인천)라는 회고기에 이길용의 영화학교 교사 시절 이야기가 등장한다.

“내 나이 14살로 영화소학교 4학년 때 체조 시간이면 ‘찜뿌’와 같은 형식으로 야구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야구 도구는 모두 자급이고 볼은 배재를 졸업하고 영화학교 선생으로 잠시 있으면서 우리 편 매니저 역할을 하던 이길용 선생이 서울서 얻어다 준 것으로 9인 1단이 제법 연습을 쌓았는데 한번 전수팀에 도전해 볼 기회까지 그 실력이 괄목 발전하였다. 하루는 이길용 선생이 일요일에 시합하기로 했다고 해 설레는 마음으로 웃터골 향기 그윽한 오동나무 밑으로 입장을 했으나 그때 스파이크, 스타킹, 운동모는 말할 것도 없고 운동복 한 벌 제대로 입은 사람이 없었다. 그때 전수편에서는 한일 첫 시합이라 대단한 호기로 나섰는데 그때 매니저 이길용 씨가 보무도 당당히 나가 저쪽 책임자인 일인 선생에게 가서 일본으로 주문한 도구 일식이 아직 오지를 않아 오늘 시합은 중지할까 하다가 인사 삼아 그냥 나왔으니 다음 공일로 연기하자고 말했다. 물론 엉뚱한 술책이요, 터무니없는 책전이었다. 이를 듣고 난 일인 선생은 걱정하지 마라, 도구 일체를 빌려줄 테니 자웅을 결해보자고 해 시합을 했는데 점수는 기억나지 않고 10대 몇으로 참패를 당했다. 이런 배짱과 대담무쌍한 지략을 겸비한 이길용 선생 덕분에 이것이 동기가 되어 미우단, 은행단, 동지구락부, 철도팀 미가등, 인중라이온스, 상업전문, 실업단, 103 은행단 등 인천에 속속 일본인 야구팀이 속속 등장하는 계기가 됐다.”


이 회고로 미루어 이길용은 청춘이 끓는 피가 용솟음치는 20대 초반부터 남다른 애국심과 의기에다 그리고 배짱이 두둑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회부 기자로 체육 담당 18년
이길용은 일본 유학 시절부터 알고 지낸 동아일보 사장인 고하 송진우의 강력한 권유로 동아일보에 입사해 기자로서 생활을 시작했다. 이때가 1922년 24살 때쯤으로 보인다. 동아일보에도 이길용의 정확한 입사 일자가 나오지 않는 탓에 전체적인 생애를 조명해 보면 이때쯤으로 추측이 된다.

이길용은 동아일보에 입사해 사회부로 배속을 받았다. 당시에는 신문사에 운동부(체육부)가 별도로 없었다. 다만 체육행사가 있을 때면 조선, 동아, 매일신보, 중앙 등 4대 일간지에서 스포츠에 관심 있고 조예가 깊은 기자가 나서서 운동란을 맡아 기사를 썼다. 그래서 예우하는 뜻에서 체육인들은 이들을 운동 주임이라고 불렀다.

이때 이길용은 때로는 아호인 파하(波荷)로, 또 때로는 월강(月江)이란 필명으로 기사를 썼다. 그리고 동아일보에서 시작해 1924년 가을에 조선일보로 옮겨 우리나라 신문 사상 처음으로 운동난 기사를 가로쓰기를 시도했으며 1927년에는 다시 동아일보로 옮겨 1936년 일제의 강압으로 기자를 그만 둘 때까지 운동 기자로 활동했다.

동아일보에 입사해 운동 주임으로 체육과 인연을 맺은 그는 한편으로는 운동 기자이면서 또 다른 한편으론 조선체육회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요 인사였다. 그는 어떤 직책이든 가리지 않았다. 운동부 기자로, 조선체육회 임원(이사)으로, 또 때로는 대회 기록 담당으로 거리낌 없이 맡아 말 그대로 전천후 활약을 했다. 그의 체육에 대한 열정을 그대로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이 동안 그는 1923년 동아일보에서 우리나라 첫 여성 엘리트 스포츠 대회인 전조선여자정구대회를 출범시키고 1929년 신년호에 ‘조선체육계 과거 10년 회고’, 1930년 ‘조선야구사’ 등을 시리즈로 집필하며 조선체육 역사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경기장에서 각종 사고가 잦자 1934년 11월 이길용기자가 앞장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체육문제에 대한 좌담회를 개최했다.[사진 동아일보 캡쳐]
경기장에서 각종 사고가 잦자 1934년 11월 이길용기자가 앞장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체육문제에 대한 좌담회를 개최했다.[사진 동아일보 캡쳐]
또 1934년 11월 조선체육회 창립 15주년 기념 전조선종합경기대회(제15회 전국체육대회) 축구와 농구 경기에서 판정에 불만을 품은 선수가 심판을 발길로 차고 선수들끼리 서로를 구타하는 사고가 벌어지자 이해 11월 12일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체육문제 좌담회를 개최했다.

'조선체육계 현하 문제 좌담회'(朝鮮體育界 現下 問題 座談會)로 명명된 좌담회에는 전국 사립학교 남자 중등학교 이상 교장 28명과 조선체육회를 비롯한 체육관계자들에게 첫째 운동경기에서 불상사 원인은? 둘째 불상사를 막기 위한 선후 대책은? 셋째 운동정신의 수립에 관한 지도원리는? 등 세가지 설문을 받아 토론회를 벌인 뒤 7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연재를 해 당시 경기장 불상사에 대해 사회에 환기시키는 역할을 했다.

[정태화 마니아타임즈 기자/cth082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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