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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학수의 사람 ‘人’] "첫 왕관의 무게는 항상 버거웠다....찬란한 빛 뒤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사라예보의 전설' 이에리사, 두 번째 자서전 '페어플레이' 출간

2020-10-28 11:24

화려한 이력이다. 우리나라 스포츠 사상 최초의 구기종목 세계 제패의 주인공, 첫 여성 국가대표팀 감독, 최초의 여성 태릉선수촌장과 국가대표 출신 첫 여성 국회의원. ‘최초’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붙었다. 스포츠의 전설로 선망과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단호한 실행력 때문에 싫어하는 이들이 생겼고, 인신공격도 많이 당했다.

이에리사(66) 사단법인 휴먼스포츠 대표이사는 여성들에게 보이지 않는 장벽을 뜻하는 ‘유리천장’이 두터운 한국스포츠에서 새로운 길을 연 ‘개척자’였다. 여성 리더를 폄하할 때 자주 쓰는 표현인 ‘추진력 부족’이라는 말은 그에게는 결코 통하지 않았다. 타고난 승부근성으로 일을 시작하면 신들린듯한 열정을 갖고했기 때문이다. 그는 최근 생애 두 번째 회고록 ‘페어플레이’를 출간했다. 1979년 국가대표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낸 ‘2.5g의 세계’라는 첫 자서전에 이어 41년만에 낸 책이다. 27일 책 출간과 관련한 인터뷰를 갖고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엘리트 선수출신 이에리사 전 국회의원은 최근 두 번째 자서전 '페어플레이'를 출간했다. 이 전 의원은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도록 하기 위해 그동안의 삶을 정리했다"고 말헀다. [정지원 기자]
엘리트 선수출신 이에리사 전 국회의원은 최근 두 번째 자서전 '페어플레이'를 출간했다. 이 전 의원은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도록 하기 위해 그동안의 삶을 정리했다"고 말헀다. [정지원 기자]


‘푯대가 되고 싶다’


- 책을 내게 된 동기는.

“그동안 내가 받은 모든 영광은 내 주변 분들의 관심과 지원, 변함없는 사랑 덕분이었다. 책에 대한 나의 소망은 소박한 것이다. 훌륭한 운동 선수를 꿈꾸는 아이들에게 동기부여와 힘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삶의 한 가운데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길을 찾는 이정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또 그동안 세상에 잘못 알려진 부분이나 세간의 오해가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설명을 하고 싶었다. 내 개인의 삶인 동시에 우리 체육사의 기록이기에 정직하고 올바른 기록을 남기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가 만 19살인 1973년 사라예보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이룬 단체전 우승은 우리나라 구기종목 사상 최초의 세계 제패인 동시에 프로복싱 김기수, 레슬링 장찬선에 이어 세 번째의 세계 제패였다. 특히 당시 난공불락으로 여겨졌던 ‘만리장성’ 중국(중공으로 불렸음)을 꺾은 것은 1970년대 한국 역사의 중요한 장으로 기록됐다. 중국은 6.25 전쟁에서 싸운 적성국이었으며, 한국이 탁구에서 세계 최강 중국을 이긴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에리사와 여자 탁구대표팀은 19전 전승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우승컵을 들어 올려 광복이후 가장 값진 스포츠 승리를 국민들에게 안겨주었다.

-첫 번째 책과 비교를 한다면.

“ 20대 때 썼던 책 서문을 다시 한번 읽어 봤다. 첫 문단에 ”내 지난 날의 얘기를 묶으면서 처음에 고민했던 것은 어린 나이에 너무 빠르지 않은 가 하는 점이었다. 이런 책은 인생을 관조할 나이 쯤에 내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어 세상 어른들에게 좀 건방지게 보일 것 같았다“라고 쓴 것을 발견하고 웃음이 났다. 모든 게 어설펐 던 때였다. 이제는 60을 넘어 인생을 관조할 나이가 돼 한 권을 책에 담을 내용이 그 때보다는 많이 풍성해지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 책에서 강조했던 점은 무엇인가

“그동안의 인생 역정을 풀어보고 싶었다. 탁구는 인생과 닮은 꼴이다. 상대에게 공을 넘기는 순간, 적어도 그 후의 3~4구를 생각해야 한다. 매 순간의 선택이 인생을 어느 방향으로 이끌고 갈지 서너 수를 미리 고민해봐야 하는 것과 같다. 많은 사람이 ‘어떻게 하면 상대방이 받아치지 못할까’를 궁리하지만 그건 하수의 생각이다. 탁구는 상대가 자신이 공을 못 받게 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치는 걸 어떻게 받아 내느냐로 승패가 갈린다. 내 인생은 그동안 끝없이 길을 내는 작업이었다고 생각한다. 내 뒤를 따르는 후배들이 늘어나면서 가던 길을 멈출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푯대가 되고 싶었다. 내가 올바르고 성공한 삶을 살아야 내 인생 여정이 후배들이 목표로 삼는 좌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후배들이 이 책을 통해 내 삶의 궤적을 배우며 인생의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에 도달할 힘과 지헤를 얻기 바란다.”

-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2012년부터 2016년까지 제19대 국회의원 임기를 마친 뒤 1년 정도 내가 할 일에 대해 고민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의견을 나눴다. 고민 끝에 비영리 사단법인 ‘이에리사 휴먼스포츠’를 탄생시켰다. 2017년 4월 법인을 발족하고 첫 해 사업으로 ‘제1회 에리사랑 시니어 탁구대회’와 ‘꿈나무 선수 장학금 전달식’을 가졌다. 시니어 탁구대회는 중장년층의 은퇴 후 사회적 고립을 예방하고 소통의 장을 제공함으로써 심신이 건강한 삶의 기반을 마련하자는 취지에서 기획했다. 노후를 건강하게 보내려면 평생 스포츠 종목들을 활성화시켜 시니어들의 건강과 행복한 삶을 돕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현재 재단을 위해 주변에서 많은 분들이 도와주고 있다. 적지 않은 금액을 돈으로 기부해주시고, 재능 기부도 해주시는 분들이 계신다. 앞으로 그늘진 곳에 있는 체육인들을 돕는 일, 저개발 국가의 어린이와 청소년들에 대한 지원 등 해야할 일들이 많다.”

'사라예보의 전설' 이에리사가 최근에 출간한 두 번째 자서전 '페어플레이'. 1973년 사라예보 세계탁구선수권 대회 신화를 만들었던 라켓을 표지에 올렸다.
'사라예보의 전설' 이에리사가 최근에 출간한 두 번째 자서전 '페어플레이'. 1973년 사라예보 세계탁구선수권 대회 신화를 만들었던 라켓을 표지에 올렸다.


이에리사라는 이름은 타고난 승부사

-이에리사 이름에 대해 궁금해 하는 이들이 많은데.

“집에서 7째로 막내 딸이었다. 언니들 이름은 ‘숙’자 돌림이다. 언니들은 ”딸도 많고 막내 딸이니 특별한 사람이 되도록 특별한 이름을 짖자“고 뜻을 모았다. 특이한 내 이름 ‘에리사’를 생각해 낸 건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둘째 종남 언니였다. 내가 태어나기 두 해전인 1954년 영국에서 엘리자베스 여왕이 즉위를 했다. 언니는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난 동생이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바래 이름을 붙였다. 가족 모두의 찬성으로 나는 특별한 이름을 가진 아이가 됐다.”

1919년생인 그의 아버지는 공무원이었다. 보통고시에 합격한 엘리트 공무원으로 명지대 설립자인 유상근 박사와 친분이 두터웠다. 충남 아산, 서산, 예산, 대덕 군수를 지냈으며 마지막으로 대전 부시장으로 공무원 생활을 마쳤다. 전근이 잦은 아버지를 따라 이사를 자주 다녔던 그는 대전 대흥초등학교 4학년 때 특활반 활동으로 본격적인 탁구를 시작했다. 5년 뒤 서울 문영여중 3년, 당시 실업 선수와 국가대표들을 제치고 전국종합선수권대회 우승을 차지하며 국내 체육계에 파란을 일으켰다. 15세의 챔피언에게 언론은 ‘듀스에 강한 승부사’라는 별칭을 붙였다.

-승부 근성은 원래 타고난 것인가.

“어릴 적부터 남다르게 승부근성이 있었던 것 같다. 대보름날 깡통 속에 불을 넣어 돌릴 때도 내 깡통의 불이 가장 커야 했고, 친구들과 ‘달고나’의 별 모양 빼먹기를 할 때도 내 것이 가장 깔끔하고 완벽해야 직성이 풀렸다. 별 모양이 깨지면, 집에 돌아와 화로에 설탕을 녹이고 달고나를 만들어 연습을 했다. 선수 때의 승부 근성이 어릴 적 버릇에서 그대로 이어진 것 같다. 패배가 싫었다. 항상 이기고 싶었다. 그래서 ‘다음 경기는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라는 것이 관심사였다. ‘노력하는 자만이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좌우명으로 삼아 열심히 훈련한 것이 경기에서는 승부기질로 연결된 것으로 보인다.”

-탁구 선수를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이들은 누구인지.

“ 탁구 선수 시절 나를 응원하고 도와줬던 분들을 하루도 잊지 않고 산다. 1960-70년대 어려웠던 시절, 대한탁구협회장으로 한국 탁구의 세계화를 이끄셨던 김창원 신진자동차 회장님과 사라예보 제패 이후 탁구 전용체육관을 마련해주시며 1988서울올림픽에서 양영자-현정화 여자복식조가 첫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하는데 큰 역할을 하신 최원석 전 회장님의 헌신에 대해 나를 비롯한 전 탁구인들이 항상 고마움을 느낀다. 이 분들의 지원과 관심이 있었기에 한국 탁구가 발전할 수 있었다. 또 박정희 대통령과 영부인 육영수 여사도 사라예보 우승이후 국내 탁구 붐 조성에 많은 도움을 주셨다 .육영수 여사는 1974년 피격되시기 전 탁구 시범경기를 참관하시고 1974년 육영사 여사배 전국탁구 선수권대회를 창설해 탁구에 큰 관심을 보여주셨다. 최근 세상을 떠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님은 탁구를 즐기셨고 사랑하셨다. 선수 시절 북한 선수 경기를 제대로 볼 수 없었을 때 한남동 자택으로 초대하셔서 당시로서는 구경하기 힘든 비디오 녹화 필름을 보면서 전략을 수립할 수 있도록 꼼꼼히 챙겨주셨던 세심한 마음을 잊을 수 없다. 20대 때 첫 번째 자서전 '2.5g의 세계'를 출간해 찾아뵀을 때 선물로 주셨던 삼성 카파 전자 손목시계를 지금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세계 정상의 무게, 빛과 그림자

-‘성공한 선수는 지도자로 성공하기 어렵다’는 말도 있는데, 지도자로서 어떻게 활동했나.

“1979년 은퇴이후 서울 신탁은행 코치를 맡아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서독 프랑크푸르티 코치 겸 선수로 2년간 나가 있다가 1982년부터 1985년까지 동아건설 코치를 맡았다. 경희대 코치를 거쳐 1994년부터 2000년까지 현대백화점 창단 감독을 맡았다. 1984년부터 2년간 국가대표 코치를 한 뒤 1988년 서울올림픽 여자팀 감독으로 양영자-현정화 복식조 금메달을 땄다. 최고의 기량을 가진 선수들이 고된 훈련을 잘 따라와 줘 큰 성과가 있었다. 성공한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해준 선수들에게 항상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 ”

-체육학 박사학위를 받고 용인대 교수로 10년간 재직했었는데.

“코치 생활을 시작할 때 아버지와 친분이 있었던 명지대 설립자 유상근 박사의 조언으로 명지대 야간부에 진학했다. 2부에는 체육학과가 없어 행정학과에서 공부를 했다. 나중에 스포츠행정 쪽에서 일을 할 경우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에서였다. 대학원에서는 본격적으로 체육학 공부를 했으며 1997년 명지대에서 생활체육과 관련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0년 용인대 교수로 임용됐을 때 내 나이 46세였다. 교수 임용면접에서 ”교수 하기에 나이가 너무 많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라고 묻길래 ”나이가 교수직을 수행하는 데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 경험과 연륜으로 오히려 젊은 교수 못지않게 경험하지 못한 것을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

-최초의 여성 태릉선수촌장으로 활동하면서 큰 어려움을 없었는지.

“태릉선수촌장은 결코 쉽지 않은 자리이다. 내가 선수 때 김성집 선생님 등 여러 촌장님들을 뵙면서 깊은 존경을 했던 것은 그 분들이 정말 헌신적으로 일하셨기 때문이었다. 선수촌장은 좋은 환경에서 선수들이 운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이다. 나는 촌장 이전에 선수들의 선배로서 선수들이 열심히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싸움꾼 소리를 들어가며 잘못된 부분을 과감히 고치려 노력했다. 몇 십년간 방치된 채로 누구도 손댈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문제들을 개혁했다. 그런 추진력 때문에 반발하는 이들도 있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여자역도 금메달리스트 장미란, 2012 밴쿠바 피겨 금메달리스트 김연아가 좋은 여건에서 운동을 해 세계 정상에 오른 것을 큰 보람으로 생각한다 ”

-엘리트 선수출신으로 첫 여성 국회의원으로 발탁됐었는데.

“용인대 보직교수로 기획처장으로 일한 지 1년쯤 지났을 때인 2009년부터 정치권에서 영입제의가 오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도 간혹 정계 진출을 권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적극적으로 생각해 본적은 없었다. 나는 체육계에서 할 일이 더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태릉선수촌장으로 일하면서 조금씩 생각이 달라졌다. 체육행정과 예산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게 되면서 정치권에서 체육을 대변해 줄 사람이 없다는게 큰 한계로 느껴졌다. 나는 엘리트 선수출신으로 스포츠 행정을 경험한 교수 출신으로 체육계의 다양한 분야에서 일해 본 경험을 장점으로 내세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후 새누리당의 영입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는 항간에 박근혜 탄핵 사건이 일어났을 때 박 전 대통령의 스포츠계 측근 인사로 분류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비례대표 공천 때부터 시작해 국회의원 활동을 하면서 박근혜 전 대통령 공관을 가거나 직접 전화를 받은 사실도 없다고 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육영수 여사가 영부인 시절 사라예보의 인연으로 탁구대회를 창설한 뒤 고인이 된 후 어머니에 이어 대회 주관자로서 만난 인연은 있었다고 밝혔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엘리트 체육에 대한 관심이 많고 체육이 국위 선양에 기여한다는 것에 공감을 가졌다고 했다. 자신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측근이었다면 비례대표가 끝난 뒤 2016년 총선에서 왜 공천을 받지 못했겠느냐며 측근설을 부인했다.

-국회의원으로 활동하시면서 어떤 점에 중점을 두었는지.

“나는 국회의원을 하면서 ‘국회에 간 체육계의 대표’라고 생각했다. 내 어깨에 짊어진 책임의 무게는 막중했다. 대부분 국회의원은 ‘표’를 의식해 생활 체육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엘리트 체육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생활체육과 엘리트 체육은 완전히 다른 길이다. 나는 투 트랙 정책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생활체육은 국가에서 시설을 마련하고 지도자와 프로그램을 제공하면 된다. 하지만 엘리트 체육은 특별 관리와 지원이 필요하다. 엘리트 체육이 성과를 거두어야 생활 체육이 활성화된다는 걸 강조했다. 정치보다는 정책에 주력해 체육유공자법, 국민체육진흥법 등을 선진국형으로 보완하도록 했다.”

-대한체육회장 선거에 두 번 출마해 낙선했던 적이 있었는데.

“두 번의 대한체육회장 선거는 지금까지 내가 겪은 최악의 게임이었다. 페어플레이를 원칙으로 여겨야 할 사람들이 규칙을 어기고 싸우는 모습을 보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국회의원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체육계 원로 몇 분이 나를 찾아와서 대한체육회장선거 출마를 적극 권유했다. 대한체육회 쇄신을 간절히 바란다는 마음으로 제안을 했다. 나는 우리 체육계에 대한 책임감과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서 그 중심으로 가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당시 대한체육회장는 박용성 두산그룹 회장님이었다. 한 달 넘게 고민을 하다가 ”열정을 갖고 아름다운 도전을 해보겠습니다“며 출사표를 던졌다. 하지만 연임 출마를 예상했던 박용성 회장님은 불출마를 선언하고 대신 김정행 용인대 총장님이 출마 선언을 했다. 용인대는 내가 몸담고 있던 학교였다. 그렇다고 출마 선언을 번복할 수도 없었다. 나는 곧 교수직을 사퇴했다. 내가 교수직을 유지하며 김 총장님과 경선에 나설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선거 운동은 인신 공격의 연속이었다. 페어플레이 정신의 수호자가 되어야 할 자리를 두고 편법과 불공정으로 경쟁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당시 투표권을 가진 대한체육회 선수위원장을 맡고 있었는데 정정당당한 승부를 위해 선거 출마와 함께 선수위원장을 사퇴했다. 하지만 박용성 회장님은 선거 직전 그 공석에 김정행 총장님의 측근을 임명해 버렸다. 선거 결과는 28-25, 3표차였다. 내가 선수위원장 자리를 포기하지 않았다면 2표가 날아가 과반수를 넘지 못해 김정행 회장님이 당선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2016년 두 번째 대한체육회장 선거에선 통합체육회장을 뽑는 선거였는데 나는 다시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무모한 출마 결심으로 보였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언제든 체육계를 위해서 일할 자세가 되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었다. 그런데 후보 등록부터 과거 정당활동 2년 조항을 이유로 등록이 안된다며 기피를 하더니 등록 마감일 누군가 법원에 가처분 신청을 한 게 받아들여져 후보로 나섰다. 투표권을 가진 대의원 중 일부가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치러진 투표에서 나는 또 한번 페어플레이가 이루어지지 않는 모습을 지켜봤다.”

인생은 끝없는 미완성의 세계이다. 매 순간 승부의 순간들이 밀려온다. 그 순간의 선택에서 이기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한다. 치열한 삶은 인간 실존의 중요한 증거이기도 하다. 한국 스포츠의 '영원한 전설' 이에리사는 자신의 인생을 책으로 치면 초판을 거쳐 이제 ‘증보판’에 들어섰다고 했다. 후배들에 의해 수정이 되고 새로운 내용이 추가된 멋진 ‘최종본’이 나오기를 계속 기다린다고 했다.

[김학수 마니아리포트 편집국장 kimbundang@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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