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손자병법] 38. 김재박, 김인식의 만천과해(瞞天過海)

이신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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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0-09-01 0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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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을 이루기위해서라면 천자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속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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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 싶었다. 발이 빠르지 않은 박진만이어서 마음 놓은 것이 잘못이었다. 재빨리 공을 뺐지만 늦을 것 같았다. 120km대의 커브였기 때문이었다.

2000년 10월 31일 수원구장 현대-두산의 한국시리즈 2차전. 2회 2사후 현대의 1루 주자 박진만이 기습적인 도루를 감행했다. 허를 찔린 두산 포수 홍성흔은 서두르다가 악송구 실책까지 저질렀다. 박진만은 2루를 지나 3루까지 내달렸다.

다행히 후속타가 터지지 않아 점수는 내주지 않았다. 홍성흔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긴장을 풀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홍성흔은 6회초에도 도루, 악송구, 3루 진루 허용의 실수를 다시 한 번 되풀이 했다.

두 번 모두 큰 실수였으나 점수와는 연결되지 않았다. 그러나 실수가 마냥 무사통과 될 수는 없는 법. 8회 기어코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무사 1, 3루였지만 1루 주자는 도루를 걱정할 필요 없는 박경완. 홍성흔은 타자에게만 신경을 집중했다.

그런데 발 느린 박경완이 느닷없이 뛰는 게 아닌가. 평소 같으면 문제없이 잡았겠지만 또 급하게 던지느라 공은 2루수 옆을 지나 뒤로 빠져버렸다. 그 사이 3루 주자 카펜터는 여유있게 홈인, 점수차가 4-2로 벌어졌고 흔들린 박명환은 홈런을 맞고 무너졌다.

현대의 과감한 도루와 연이은 홍성흔의 송구 실책. 큰 경기에서 흔히 나올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아무래도 이상했다. 두산의 김인식 감독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루의 타이밍이 너무 딱 맞아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현대 주자들을 바라보니 현대 주자들이 진루만 하면 타자에게 이런저런 손짓을 하는 게 아닌가. 틀림없이 사인 훔쳐보기였다.

그렇게 2차전까지 패한 김인식 감독은 경기 후 기자회견장에서 “현대가 비겁하게 사인을 훔쳐봤다.”며 흥분했다. 현대 김재박 감독은 당연히 ‘당치 않은 소리’라며 부정했다. 하지만 정황으로 볼 때 김인식 감독의 주장에 일리가 있었다.


삼성을 4연패로 몰아치며 일찌감치 플레이오프전을 끝낸 현대 김재박 감독은 두산이 LG와 치고받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전력 탐색차 찾은 경기장이어서 그때 두산의 사인을 연구할 시간은 충분했을 터.

간첩을 심어 적의 동태를 파악하고 일부러 첩자를 풀어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이기기 위해선 천자라도 속여야 하는 것이 전쟁이다. 사인을 훔쳐본 것은 분명 비신사적인 행위지만 사인을 도둑질 하지 못하도록 해야 하는 것 역시 싸움에서 이기는 한 전략이다.

김재박 감독은 1982년 세계선수권대회 때 사인을 잘못 읽어 ‘역적’이 될 뻔 했으나 그 유명한 ‘캥거루 번트’를 성공시켜 ‘영웅’이 된 인물. 당시 한국 팀의 어우홍감독은 결승 상대인 일본이 한국의 사인을 분석했다는 것을 알고 경기 전 사인을 전면 재조정했다.

전날과는 달리 일단 오른손으로 시작하는 동작은 모두 가짜라고 했다. 한국팀 사인을 분석한 일본 벤치는 사인이 바뀐 줄 모르고 번트에 대비에 공을 뺐고 그 사실을 깜빡한 김재박은 번트 사인인줄 알고 멀리 빠지는 공에 펄쩍 뛰면서 배트를 갖다 댄 것이었다. 다행히 내야안타가 되었고 그것이 한국 팀 역전우승의 발판이 되었다.

사인 훔치기는 결코 신사적인 행동은 아니다. 하지만 사인 도둑질 때문에 졌다고 해서 그 패배가 정당화 되는 것은 아니고 승리가 무효화 되는 것 역시 아니다. 야구엔 기본적으로 속이고 훔치는 게 들어가 있다.

[이신재 마니아리포트 기자/20manc@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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