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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손자병법] 김성근 감독의 중과지용(衆寡之用)

2020-06-16 01:22

-군사의 많고 적음에 따라 전략을 세운다.

[프로야구 손자병법] 김성근 감독의 중과지용(衆寡之用)


큰소리를 쳤지만 막상 선수들을 쳐다보니 한심했다. 믿을만한 투수라곤 김원형, 성영재, 조규제 정도. 그나마 모두 선봉장감은 아니었다.

“올시즌 우리의 목표는 4강이다”.

김성근 감독은 쌍방울에 부임하며 한 취임 일성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 선수들까지 감독의 말을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릴 정도였다.

김감독의 ‘4강 다짐’. 전문가들도 감독의 선수 사기 진작용 쯤으로 생각했다. 제 아무리 용병술의 귀재라도 2년 연속 꼴찌를 한 쌍방울의 전력으론 어림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김성근 감독은 나름의 ‘확실한 묘수’를 마련해 두었다. 절대 에이스가 없는 마운드. 고만고만한 투수들을 고르게 기용하여 1인당 4~5승씩 올리게 하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일 뿐 실제 상황에선 이루기 힘든 목표였다. 언젠가 모 구단 사장이 “투수 9명을 항시 준비시켰다가 매일 1이닝씩 던지면 늘 이길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가 망신당한 적이 있었는데 그와 비슷한 발상이었다.

얼핏 일리 있는 말 같기도 하지만 모르니까 할 수 있는 말. 1이닝을 던지더라도 연습 피칭을 4~5배는 해야 하기 때문에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었다.

투수 출신이어서 누구보다 그 점을 잘 알고 있는 김성근 감독. 그는 선발, 중간계투, 마무리 등으로 세분화되어 있는 프로야구의 일반적인 투수 기용법을 파괴했다. 15명의 투수를 3개조로 나누어 3일에 한 번씩 기용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선발, 중간, 마무리가 따로 없는 총력 체제하의 투수 기용 전략으로 ‘마운드의 인해전술’이고 ‘벌떼 전략’이었다.

전문가들은 김 감독의 투수 기용법을 보며 프로야구가 아니라 동네 야구라며 혀를 끌끌 찼다. 그렇지만 에이스가 없는 쌍방울의 사정상 그것이 최상의 전략임을 김 감독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김성근 감독의 ‘투수 총동원령’속에 1996년 프로야구가 개막되었고 쌍방울은 개막전에서 전 해 우승팀 해태와 맞붙었다. 당연히 해태의 연승이 예상된 광주의 개막 2연전이었으나 뜻밖에도 쌍방울의 연승으로 끝났다.

김성근 감독은 첫 게임에 4명, 두 번째 게임에 3명의 투수를 투입하며 승리를 잡았다. 마운드가 조금이라도 흔들릴 것 같다 싶으면 횟수에 관계없이 투수를 바꾸었다.

1차전은 김원형, 2차전은 성영재가 선발이었지만 둘 다 5회를 채우지 못해 승리투수가 되지는 못했다. 대신 중간계투와 마무리로 나와 2이닝 이하를 던진 김기덕과 조규제가 승리를 챙겼다.

해태를 꺾은 개막전 연승이었지만 쌍방울에 대한 기대치는 여전히 없었다. 반짝 상승세를 유지하다가 무리한 투수 운용이 문제가 되어 1개월을 못 넘기고 결국 사그라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쌍방울의 상승세는 한여름에도 계속되었고 9월 10일 광주 해태전에서 ‘벌떼 작전’의 진수를 보이며 4강을 확정지었다. 해태가 3회까지 3-0으로 앞서 나간 이날 경기에서 김성근 감독은 8명의 투수를 마운드에 올렸다.

선발 김기덕이 2.1이닝, 최정환이 1.2이닝, 박성기가 0.1이닝, 김원형이 0.2이닝, 박주언이 한 타자, 김현육이 0.2이닝, 조규제가 2.1닝, 김민국이 1이닝을 던지게 하는 등 조금만 이상하면 투수를 갈아치웠다.

어지러운 마운드. 김 감독은 경기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가 최소한 한 수 앞을 내다보며 투수들을 오르내리게 했는데 초반 열세에도 불구하고 결국 경기를 14-8로 뒤집었다.

에이스 없는 마운드. 어찌되었든 쌍방울은 그 마운드로 시즌 70승을 올리며 페넌트레이스 깜짝 2위를 차지했다. 물론 그 승리는 당초 김 감독이 구상했듯 1승씩 주워 모은 것이었다.

14명의 합작 승리로 두자릿 수 승전은 10승의 성영재가 유일했다. 김기덕, 오봉옥이 각 9승, 최정환 6승, 김원형, 조규제, 박성기가 각 5승, 김현욱, 박주언, 유현승이 각 4승, 박진석 3승, 김민국, 신영균이 각 2승, 김석기가 1승을 올렸다.

게릴라식 전투를 연상케 한 기상천외한 투수 기용. 투수들의 면면을 다 꿰뚫고 있으면서 경기의 흐름을 읽고 한 박자 빠르게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가능한 전술이고 전략이었다.

[이신재 마니아리포트 기자/news@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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