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구장에도 그런 순간이 있다. 입장 통로를 빠져나와 그라운드의 잔디가 와락 눈앞에 펼쳐지는 그 찰나, 발걸음이 저도 모르게 멎는다.
두 공간은 종목도, 분위기도 전혀 다르다. 그런데 첫 순간의 느낌은 묘하게 닮아 있다. 라운드를 마치고, 혹은 경기장을 나서고 나면 그 느낌은 더 선명해진다. 아침에 안고 나온 직장 걱정, 어제의 말다툼, 이번 주 마감, 그 모든 것들이 어딘가로 흘러내린 듯 사라진다. 기분 탓일까. 아니다. 뇌가 한 일이다.
△ 초록은 눈이 가장 편안하게 쉬는 파장이다.
인간의 눈은 가시광선 스펙트럼 중 초록 파장에서 감도가 가장 높다. 망막과 시각피질이 가장 자연스럽게 작동하는 색이다. 붉은색이나 파란색처럼 초점 조절에 힘을 쓸 필요가 없다. 골프장 페어웨이를 내다보든, 야구장 외야 잔디를 바라보든, 그 순간 눈의 수정체 근육은 이완에 가장 가까운 상태로 수렴한다. "눈이 트인다"는 말은 낭만적 표현이 아니라 실제 생리 반응이다.
흥미로운 점은 잔디의 결, 나뭇가지의 분기, 구름의 가장자리가 모두 자기 반복 구조를 공유한다는 사실이다. 뇌는 이 패턴에 노출될 때 이완과 집중이 동시에 일어나는 알파파 상태로 전환되고, 스트레스 지표가 눈에 띄게 낮아진다. 섬세하게 설계된 골프 코스도, 정교하게 다듬어진 야구장 그라운드도, 의도치 않게 뇌를 달래는 공간이 되는 이유다.
△ 그 안에 있는 동안 전전두엽은 쉬고, 뇌는 충전된다.
인간의 주의에는 두 종류가 있다. 회의, 이메일, 운전처럼 의식적으로 긴장을 유지해야 하는 주의는 판단의 사령탑인 전전두엽을 빠르게 소진시킨다. 반면 잔디 위를 걷거나 탁 트인 그라운드를 멍하니 바라보는 경험은 전전두엽을 쉬게 한다. 그 틈에 DMN(디폴트 모드 네트워크), 즉 아무것도 적극적으로 하지 않을 때 오히려 조용히 켜지는 뇌의 공회전 엔진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뇌는 그 시간 동안 스스로를 정리하며 회복한다. 창의력과 통찰은 바로 이 공회전의 순간에 소리 없이 태어난다.
18홀을 라운드하면서 걷는 것, 카트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 그린에서 라인을 읽다가 무심코 먼 산을 바라보는 것, 야구장 관중석에서 이닝 사이 그라운드 정비를 멍하니 내려다보는 것, 파울볼 하나를 기다리며 외야를 바라보는 것, 이런 모든 행위가 그 회복의 연속이다. 경기장을 나선 뒤 머리가 개운한 이유는 의지나 기분의 문제가 아니다. 뇌가 실제로 쉬었기 때문이다.
한 가지 더, 흙과 잔디에서 풍기는 특유의 냄새, 비 온 뒤 맡게 되는 그 서늘하고 묵직한 향은 후각 수용체를 통해 변연계에 직접 닿아 마음의 안전벨트인 세로토닌 분비를 촉진한다. 이른 아침 골프장의 그 묘한 평온함도 야구장에 들어서는 순간 코끝을 스치는 흙 냄새가 주는 설렘도 정체는 같다.
△ 호연지기(浩然之氣) 넓은 데서 키우는 것
맹자는 제자 공손추에게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설명했다.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찬 크고 넓은 기운, 억지로 가르칠 수 없고 오직 자연과 함께 쌓아가는 것이라 했다. 탁 트인 페어웨이 앞에 설 때도, 야구장 외야를 가득 채운 초록 앞에 섰을 때도, 가슴 어딘가가 조금 넓어지는 그 감각을 아마 2,500년 전 맹자도 비슷한 무언가를 알았을 것이다.
뇌과학은 이제 그 감각에 이름을 붙인다. 편도체의 경보가 꺼지고, 전전두엽이 쉬며, 알파파가 잔디 결을 따라 흐른다. 호연지기는 서재 깊숙이에서 오지 않는다. 초록이 넘실대는 그 공간 위에서 자란다.
골프채를 들고 나가든, 야구 모자를 쓰고 입장하든, 당신의 뇌는 자연의 초록을 기다리고 있다.
[김기철 마니아타임즈 기자 / maniarepor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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