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스포츠 100년](69)올림픽 참가를 위한 염원⑥브런디지 컬렉션(하)KOC의 IOC 가입은 코리아의 노력과 희생이 올림픽 정신에 부합

정태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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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1-04-13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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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월 스위스 생모리츠에서 열린 제5회 동계올림픽대회 사상 처음으로 태극기를 앞세우고 입장하는 선수들. 한국은 5명으로 이루어진 초미니 선수단이었다.
신생독립국 조선(KOC)의 IOC 가입은 1947년 6월 20일 에드스트롬 IOC 위원장과 25명의 IOC 위원이 참석한 스웨덴 총회에서 17번째 논의 사항으로 상정돼 만장일치로 가결됐다.

KOC는 IOC 가입을 위한 두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지 못했다. 최소한의 국제경기단체 가입 요건에 미달한 것이 첫 번째이고 정부가 수립되기 전이라는 점이 두 번째였다. 그런데도 IOC는 만장일치로 KOC의 가입을 인준했다.

과연 그 까닭은 무엇일까?

코리아의 노력과 희생은 올림픽 정신에 부합
이 부분에 대해서는 유추해석만 가능하다. 브런디지가 IOC의 KOC 인준은 잠정적이라고 했지만 정식 인준이 되기까지 과정이나 언제 정식인준이 되었는지는 대해서는 어디에서도 자료를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

가장 먼저 유추할 수 있는 부분은 우리가 기울인 노력이 ‘올림픽의 이상 아래 스포츠를 권장하고 모든 국가와 선수 간의 우호를 촉진한다.’는 IOC의 정신에 부합한 덕분이다. 당시 세계의 시대 상황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많은 신생 독립국이 출범할 즈음이었다. 따라서 IOC로서는 올림픽에 참가하기 위한 KOC의 희생과 노력이 다른 국가에게도 좋은 선례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IOC 총회를 두 달 남짓 앞둔 1947년 4월 17일 서윤복이 제51회 보스턴마라톤대회에서 우승하자 한 달 뒤인 5월 17일 미 군정청장인 하지 중장이 브런디지에게 보낸 전보에서도 이를 감지할 수 있다.

"현재까지 보고된 조선의 올림픽 참가에 대한 귀하의 노력에 감사한다. 서윤복의 보스턴마라톤 우승은 조선인의 자부심을 크게 자극했다. 조선 주둔 미군이 서윤복의 항공료를 후원한 것은 우리에 대한 좋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이처럼 미국이 조선의 올림픽 참가를 도울 수 있다면 이는 또 다른 미국의 희망의 손길이며 민주주의 구축에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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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4월 17일 제51회 보스턴마라톤대회에서 서윤복이 우승하면서 KOC의 IOC 가입은 더욱 탄력을 받는 계기가 됐다.
서윤복의 우승은 조선뿐만 아니라 미국 내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왔다. 당시 미국올림픽위원회 위원장으로 KOC의 IOC 가입을 앞장서 돕고 있던 브런디지가 더욱 힘을 얻었음은 물론이다.

하지 중장이 전보를 띄운 사흘 후에는 워싱턴 한인위원회도 브런디지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는 서윤복의 마라톤 제패로 고무된 교민사회 분위기와 조선에 대해 달라진 미국 스포츠 관계자들의 인식을 담아 브런디지의 협조를 요청했다.

"… 뉴욕에서 마호니 판사와 댄 페리씨와 나눈, 조선의 1948년 올림픽 참가 기회에 대한 대화도 즐거웠다. 두 분과 또 다른 많은 미국 스포츠 관계자들이 함께 한 조선 마라톤 팀 기념 점심에서도 모두 조선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모든 것이 당신 손에 달렸음에 우리 모두 공감하고 있다. 조선이 아직 독립국가로 출범하지는 않았지만 다음 달 열릴 총회에서 당신이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어 다행이다. 당신의 편지에서처럼 조선이 IOC 규정을 준수할 수 있기를 여기서도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 … "

브런디지를 향한 지원 요청은 이처럼 전방위적으로 이루어졌다. 총회를 눈앞에 둔 6월 4일 하지 중장은 마지막으로 브런디지에게 펀지를 보낸다. 브런디지가 앞서 ‘조선이 독립국가가 아니기는 하지만 총회에서 잘 해결될 것으로 믿는다. 나는 한국의 인준에 긍정적이다.’라고 쓴 편지에 대한 답신이었다.

이 답신은 총회장인 스톡홀름으로 떠난 전경무가 비행기 추락사고로 숨진 직후 발송됐다. 편지 내용 중 ‘IOC 총회에서 조선이 확실하게 인준을 받도록 당신이 모든 가능한 일을 할 것으로 믿는다.’라는 다짐은 전경무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조선의 올림픽 참가운동이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무언의 압력이기도 했다.

KOC 인준을 알리는 편지는 총회 한 달 후인 7월 18일 작성돼 송달됐다. KOC 대표로 총회에 참석한 이원순 앞으로 보낸 편지의 수신 주소는 서울이 아니라 미국 뉴욕시 이스트 휴스턴가 105번지에 있는 이원순의 사무실이었다. 물론 이 때는 IOC가 KOC를 인준한 사실이 알려지고 한참 뒤다. IOC 사무총장인 오토 마이어 이름으로 발송된 이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47년 6월 20일 스톡홀름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귀 NOC가 공식적으로 인준된 것을 확인한다. 올림픽 정신의 확산을 위해 앞으로 소중한 협력을 해줄 것에 감사드리며 귀 위원회의 성공을 기원한다. 런던과 생모리츠로부터 1948년 올림픽에 공식 초청을 받을 것이다."

우리 선수단은 이 편지대로 1948년 1월 30일부터 2월 8일까지 스위스 생모리츠에서 열린 제5회 동계올림픽에 처음으로 출전한다. 5명의 미니 선수단이었고 성적도 보잘 것 없었지만 처음으로 태극기를 앞세우고 출전한 기쁨은 더할 나위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7월 제14회 런던올림픽에 67명의 선수단을 파견하게 된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이다.

다시 부연하면 KOC는 IOC 가입을 위한 두 가지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다. 이에 따라 브런디지는 분명하게 IOC의 KOC 인준을 잠정적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그 잠정적 인준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정식 인준으로 바뀌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브런디지는 정부가 수립되면 다시 검토될 것이라고 했지만 이와 관련한 어떤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앞으로 추가적인 사료 발굴을 통해 밝혀져야 할 것이다.

[정태화 마니아타임즈 기자/cth082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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