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충복에게 목례를 하며 들어선 선수는 이범열. 영건의 대표주자 중 한명으로 이충복이 무척 아낀다는 제자였다. 이범열 역시 ‘이충복 아니면 누구한테도 배우지 않겠다’고 했을 정도의 ‘이충복 바라기. 그는 이충복을 ’호랑이 선생님‘이라고 했다.
첫 공을 치면서 스승을 쫒아갔다. 3점대에 머물렀지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이충복은 이후 내내 공타를 날렸다. 그 사이 차근차근 따라가 추월 한 후 기어코 먼저 9점고지에 올랐다.
이범열은 2, 3세트도 접수, 3-0으로 앞서 나갔다. 이제 한 세트만 더 따내면 ‘파이브앤식스 코리아 당구 그랑프리’ 3쿠션 개인전 8강 진출이었다. 이범열은 의욕적이었다. 그러나 이충복은 그 상황임에도 의욕적이지 않았다.
이충복의 1세트 여섯 번째 공은 비교적 평이한 옆돌리기 형태. 맞추고 나면 다음 공도 잘 서는 포지션형 배치였다. 그러나 이충복이 친 공은 지나치게 얇게 맞아 반대편에서 돌아 나오지도 못했다.
어처구니없는 실수였으나 이충복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마치 안맞은 게 다행이라는 태도였다. 물론 그렇지 않겠지만 이충복은 승리에 대한 욕심이 많은 것 같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순했다. 제자와의 대결에서 ‘너무 악착같았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으려는 마음인 듯 했다. 1점차의 아슬아슬한 순간에도 망설임 없이 큐대를 내밀며 빠르게 공격했다.
이충복이 공격 할 땐 5초 경고음이 들리지 않았다. 이범열은 경고음을 숱하게 들으며 공격했으나 이충복은 10초 안팎에서 공격 했다. 이충복이 펼친 50여차레의 공격에서 경고음이 나온 것은 한 두 번에 불과했다.
이범열은 매세트 타임아웃을 사용했으나 이충복은 5세트에서 처음 썼다. 내리 지고있던 3세트까지 별 고민 없이 큐대를 날렸다는 이야기. 그러면 그중에 난구가 없었을까. 당연히 있었다.
그럴 때도 이충복은 그냥 쳤다. 맞는 것은 맞는대로, 안맞는 것은 안맞는대로 대충 넘어가는 것 처럼 보였다. 평범한 공을 놓친 게 몇 번인지 모른다. 그대로 0-4로 끝날 듯 한 경기는 두 차례 더 이어졌다.
당구란게 묘해서 지려고 해도 그 역시 마음대로 안된다. 4세트 들자 이범열이 갑자기 난조에 빠졌다. 열심히 쳤는데도 조금씩 빠져나갔다. 그의 공이 엇나갈 때 마다 이충복은 이범열보다 더 아쉬워 했다. 얼굴에, 행동에 나타났다.
이충복으로선 달리 방법이 없었다. 눈에 확 보이게 안 칠수도 없는 노릇, 그냥 그냥 치다보니 세트포인트에 이르렀다. 4세트를 그렇게 이겼고 5세트는 또 첫 큐에 5연속득점, 지기 힘든 경기가 되었다.
4세트와 5세트에서 이범열이 얻은 점수는 각 3점씩 6점뿐이었다. 그렇게 치고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다. 6세트도 처음 분위기와 막판 분위기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처음엔 실마리를 풀지 못했고 막판엔 마무리를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범열은 어쨌든 스승을 잡을 수 있는 능력의 보유자였다. 스스로 터닝포인트를 잡아 밀고 나갔고 먼저 8점에 올랐다.
이충복은 즐기듯 천천히 뒤를 따라갔다. 이범열에게 남은 점수는 이제 1점. 하지만 그 1점이 문제였다. 좀처럼 오지 않았다. 세차레의 공타가 이어졌다. 그 사이 이충복도 7점에 머무르며 같이 ‘빠르게 공타’를 날렸다.
힘들여 마지막 점수를 올려 9:7로 스승을 이긴 이범열은 이충복에게 다가가 깍듯하게 인사를 올렸다. 이충복은 졌음에도 얼굴에 즐거운 기가 떠돌았다.
져 준건 아니다. 그렇다고 마냥 진 것도 아니다. 악착같이 해서 이기려는 마음이 없었다. 애제자와의 싸움이니까. 그런 느슨한 마음이 이충복의 큐를 허술하게 만들었을 터. 정이 들어간 손속은 결코 매울 수 없다.
[이신재 마니아타임즈 기자/20manc@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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