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체육 100년100인100장면] 39. 200g의 승리. 대한민국 첫 세계선수권자 레슬링 장창선](https://cgeimage.commutil.kr/phpwas/restmb_allidxmake.php?pp=002&idx=3&simg=20201108061105022808f6b75216b21121740159.jpg&nmt=19)
1964년 도쿄 올림픽 레슬링 자유형 52kg급 결승전. 장창선은 일본의 요시다 요시가츠에게 판정패, 은메달에 머물렀다. 대한민국 레슬링의 올림픽 첫 메달이었지만 일본에게 진 것이 너무 억울했다. ‘다음엔 반드시 이긴다.’ 장창선은 각오를 다지고 또 다졌다.
1966년 미국 토레도 세계레슬링선수권대회. 대진표를 받아 든 장창선은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컨디션이 좋아지는 3차전과 그 이후에 난적인 일본의 가쓰무라를 비롯 소련, 미국과의 싸움이 있었다. 해볼 만 했다.
언제나 1, 2차전이 문제였다. 하지만 그건 당연한 것이었다. 감량을 하느라 진을 다 뺏기때문이었다. 장창선은 평소 체중은 58~59kg, 출전 체급은 52kg급. 비교적 많이 빼는 편이었지만 56kg급에 나가면 승산이 없었다.
이기자면 6~7kg의 감량은 참아내야 했다. 대회 보름 전부터 서서히 빼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운동을 꾸준히 하기에 살 찔 겨를이 없었던 몸에서 또 살을 들어내는 작업이니 고역 중의 고역이었다. 그렇게 빼니 첫 경기가 좋을 리 없었다.
1차전 폴란드, 2차전 아르헨티나, 쉬웠다. 3차전은 가쓰무라. 어려운 상대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일본선수 무섬증이 있었다. 2점을 먼저 얻어놓고도 노심초사하다 막판에 동점을 내주는 바람에 벌점 3점을 받았다.
터키, 소련은 잘 넘었다. 마지막 상대는 홈 매트의 미국 샌더스. 꼭 이겨야 했고 이길 수 있는 상대였지만 미국 관중들의 일방적인 응원 탓에 어찌어찌하다 3-3으로 비기고 말았다. 벌점 5점이었다.
상황이 복잡해졌다. 장창선은 경기를 끝냈지만 샌더스와 가쓰무라는 맞대결을 남겨놓고 있었다. 경기 결과에 따라 순위가 왔다갔다했다. 장창선이 가장 유리했지만 공동1위가 나올 수 있었다. 그럴 경우 몸무게로 순위를 정했다.
볼 것 없었다. 무게를 줄여야 했다. 장창선은 뜨거운 사우나실로 달려갔다. 아니 단장, 감독 등에게 끌려갔다. 그들은 장창선을 밀어 넣고 밖에서 문을 잠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조그만 유리문을 두드리며 열어달라고 했다. 밖에선 본 척도 하지 않았다.
더욱 세게 두들겼다. 마찬가지였다. 유리를 부술 생각으로 쳤으나 그건 그렇게 쉽게 깨지는 유리가 아니었다. 단장을 비롯 서넛의 선배들이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그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에겐 그렇게 보였다.
욕이 절로 튀어나왔다. 나가면 당장 죽일 듯 펄펄 날뛰었다. 밖은 여전히 오불관언이었다. 날뛰니 더 죽을 것 같았다. 의식이 조금씩 사라지는 듯 했다. 어느 순간 무의식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기분이 묘했다. ‘아, 이러다 죽겠구나’하는 생각이 들 즈음 문이 열렸다.
10cm 밖의 세상은 그야말로 황홀했다. 금메달이고 뭐고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저 그 순간이 생애 최고였다. 그때 뭔가 번쩍했다. 코피가 흘렀다. 하경대 단장이 한방 날린 것이었다. 조금의 피라도 빼서 무게를 줄이려는 안간 힘이었다.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 가쓰무라와 샌더스가 4-4로 비겼다. 가쓰무라도 벌점 5점. 최후의 계체량. 장창선이 먼저 체중계에 올랐다. 52kg. 가쓰무라가 뒤이어 올랐다. 52kg을 넘어가는 듯 했다. 52.2kg.
200g. 대한민국 최초의 세계대회 금메달이었다.
모두들 좋아서 난리였다. 장창선도 ‘좋아 죽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머리 한편에서 불쑥 한 생각이 떠올랐다. 200g이면 코피는 안 흘려도 되는 것 아니었나. 아니 그것 때문에 200g이 준 것일까?
장창선에게 가난은 숙명이었다. 전쟁 중에 부친이 실종되었고 어머니는 인천 신포동 시장에서 콩나물 장사를 하며 1남3녀의 네 남매를 키웠다. 그 가난은 또 한편 그를 챔피언으로 키운 의지의 밑천이었다.
그래서 장창선이 1966년 미국 토레도에서 열린 세계레슬링선수권대회 자유형 52kg급에서 우승, 대한민국의 첫 챔피언이 되자 국민들은 함께 울고 웃었다. 그의 세계 제패는 행운이나 우연이 아니었다. 반드시 ‘하고 만다’는 투혼의 결과물이었다.
가난을 타고 난 작은 청년(키 1m58)의 세계 제패는 그 시절 많은 이들에게 감동과 희망을 주었다. 단지 스포츠의 승자로만 본 것이 아니었다. 불패의 헝거리 정신을 높이 산 인생의 승자로 보았다. 운동을 하기위해 틈틈이 아이스케키 통을 들고 산기슭을 오르내리고 신문 배달을 한 것이 알려졌다.
박정희 대통령은 시대의 아이콘이 된 장창선에게 집 한 채 살 수 있는 격려금(105만원)을 주었다. 수많은 독지가들이 그를 돕겠다고 나섰다. 언론에 발표된대로 그 격려금을 다 받지는 못했으나 장창선은 가난에서 벗어나 레슬링 후학들을 키우는 일에 나설 수 있었다.
콩나물 엄마의 위대한 승리이기도 했던 장창선.
이 작은 청년은 훗날 이건희를 레슬링으로 이끈 디딤돌이 되었고 이건희는 그 길을 열심히 가다가 IOC위원, 평창동계올림픽을 만났다. 삼성그룹 회장과는 또 다른 길이었다.
[이신재 마니아리포트 기자/20manc@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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