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사 창립 당시 풋풋한 30대 초반이었던 이민기 회장은 이제 환갑을 넘겼지만, 그가 애지중지 조이고 다듬은 석교상사는 그가 사업을 시작하던 때와 거의 같은 30대로 성장해 그의 곁을 지키고 있다 . 이 회장을 만나 30년 전, 그리고 현재의 ‘석교’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골프 사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 한국프로골프협회 회장을 역임한 김승학 회장 때문이었다(김승학 회장이 이 회장의 매형이다). 1985년 김승학 프로와 브리지스톤의 계약을 맡아 진행했었다. 당시 외국 브랜드와 계약한 한국 선수는 없었다. 김승학 프로가 처음이었다. 내가 일본으로 건너가 계약서를 살피고 사인을 했었다. 그 일이 계기가 됐다.
1985년이라면 골프 불모지였을텐데. 골프 사업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나?
- 석교상사를 설립하기 전에 가방 수출 회사에 다녔었다. 수출 팀에 있었는데 미국 지사로 발령이 났고 LA에 잠시 머물렀다. 또 김승학 프로 계약을 위해 일본을 자주 왕래했었다. 그러면서 미국과 일본에서 성공하는 사업은 우라나라에서도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승부를 걸 수 있다고 봤다.
30년 전 골프 환경은 어땠나?
- 당시에 골프클럽은 위화감을 주는 품목이었다. 한마디로 ‘불필요한’ 제품이었다. 그래서 세금도 높았지만 통관할 때 감시도 심했다. 규제나 억압이 지금보다 심했다. 관세청에서 부르면 죄인처럼 찾아갔고, 그들에게 꾸짖음을 당했다 “골프채나 수입하는 사람들이…”라고 했었다. 당시에는 수출하면 애국자, 수입하면 나라의 이익에 반한다는 정서가 있었다. 거기다가 골프클럽이었다. 골프 수입상을 하는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냥 ‘무역업’ 한다고 둘러대기도 했다.
골프숍이나 수입상도 많지 않았을텐데?
- 골프숍이 20여곳 있었다. 은퇴한 프로 골퍼 출신이 자신의 이름을 내건 ‘프로숍’ 개념이었다. 수입상도 몇군데 없었다. 던롭을 수입하는 삼협, 미즈노를 수입했던 선경(지금의 덕화산업), 정스포츠(핑과 톱플라이트), 전신양행(벤호건) 등이었다. 석교상사와 내가 업계의 막내였다.
회사 이름을 ‘석교’라고 지은 이유는?
- 브리지스톤 창업주의 이름이 ‘이시바시 石橋’다. 브리지스톤, 말 그대로 ‘돌다리’다. 나는 미국 일을 정리하느라 86년쯤에 합류했는데, 회사 이름이 그렇게 정해져있었다. 그래서 바꿨다. 일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때였고, 나 자신도 어떤 자존심인지 모르겠지만 한자를 그대로 쓰기는 싫었다. 그래서 ‘현명할 석 碩’ 자에 ‘만날 교 交’ 자로 바꿨다. ‘좋은 만남’이라는 의미다.
첫 사무실은 어디였나?
- 서울 퇴계로2가 극동빌딩 인근 건물 4층에 있었다. 당시에는 큰 트럭이 용품을 싣고왔다. 큰 차들은 새벽에만 도심에 진입할 수 있기 때문에 새벽 6시 이전에 사무실 앞에 물건을 풀고 가야했다. 따라서 물건이 들어오는 전날에는 사무실에서 잤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건물이라 4층까지 물건을 힘들게 올리고, 인근 종로3가의 목욕탕에서 씻고, 다시 일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 때 너무 힘들었다(웃음) .
우리나라에서 골프가 고속 성장한 시점은 언제인가?
- 두 번 있었다. 88서울올림픽과 박세리가 미국LPGA투어에서 우승하던 해다. 석교도 이 두 번의 시기에 동반 성장했다. 브리지스톤은 ‘점보’ 등의 모델이 인기가 높았다. 대부분 선수용이었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단조 아이언. ‘어렵다, 선수용 클럽이다’라는 이미지는 그 때부터 생긴 것 같다.
30년 역사를 통틀어 빅 히트 모델을 꼽는다면?
- 프로230이다. 골프숍에서 돈 들고 찾아와 물건 들어오면 달라고 한 것이 그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웃음). 당시 세금도 높아 120만원이었는데도 잘 팔렸다. 올해 J815 드라이버가 프로230의 인기에 준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인기는 많지만 그만큼은 아니어서 아쉬웠다.
베스트셀러는?
- V300 아이언 시리즈다. 올해 다섯 번째 모델이 나왔다. 그래서 올해 투어스테이지에서 브리지스톤으로 라인이 바뀌었지만, V300을 포함한 몇개의 모델은 수입하는 쪽으로 협의를 했었다.
30년동안 위기가 많았을텐데.
- 회사를 운영할 때 영업 이익이 나지 않아 사이즈를 줄여야 할 때가 가장 힘들고, 어렵다. 누구나 마찬가지였겠지만 IMF와 리먼 때는 정말 힘들었다. IMF 때는 환율이 두 배로 뛰고, 소비자의 심리도 위축돼 어려웠다. 그 때 난 스노우보드를 너무 좋아했는데 이전에는 자랑삼아 보드를 차 위에 달고 다녀었다. 하지만 IMF 때는 차 안에 넣고 다녔고, 집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올 때도 누군가 볼까 위축되기도 했다. 과소비가 ‘적’이 되는 상황이었다. 소비 심리가 얼고, 골프 쪽은 더 어려웠다.
그 상황을 어떻게 극복했나?
- 매출도 절반으로 떨어졌다. 결국 직원을 줄일 수 밖에 없었다. 직원을 내보내면서 다른 곳에 취직을 시켜주기도 했지만, 미안했다. 리먼 때는 달랐다. 직원이 “월급을 줄이겠다”고 했고 “무급 휴가를 가겠다”고도 했다. 나도 월급을 가져가지 않았다. 해외로 무급 휴가를 간다는 직원에게는 대신 여행비를 주었다. 2~3개월 잘 버티니 상황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이후에 회사가 정상으로 돌아왔을 때 그 때 주지 못했던 급여을 다시 돌려주었다.
2015년 11월 현재는 어떤가?
- 잘 나가던 투어스테이지에서 브리스톤으로 바뀌었다. 물론 두려웠다. 그래서 브리지스톤과 합의해서 V300 등 몇몇 모델은 수입하기로 했다. 다행히 J815 드라이버가 선전하고, 페어웨이우드도 많이 팔렸다. 작년보다 10% 성장하지 않았을까?

-브리지스톤 클럽이 많이 알려질 것 같다. 사람들은 처음 접하는 브랜드에 대해서는 용기를 내지 않는다. 의심하고, 신뢰를 주지 않느다. 따라서 작년에는 브리지스톤 볼 광고를 엄청 많이 했고, 올해는 J815 드라이버에 초점을 맞췄다. 그래서인지 브리지스톤에 대한 인지도가 높다. 반응도 괜찮다. 아마도 내년에도 10% 이상 성장하지 않을까 예상한다.
올해 삼성동 사옥을 리뉴얼한 것으로 안다. 리뉴얼에서 어떤 부분에 초점을 맞췄나?
- 사옥은 2002년에 지었고 올해 4월 리뉴얼을 시작해 6월에 오픈했다. 이전에는 오피스와 애프터서비스 두 가지만 강조한 건물이었다. 리뉴얼을 하면서 우리 고객이, 마니아가 여기에 와서 쉬고, 즐기고, 새로운 제품을 접하고 다뤄볼 수 있게 하자고 컨셉트를 잡았다. 마니아가 우리 제품을 사용하는 것에 프라이드를 느낄 수 있게. 프라이드를 더 느낄 수 있는 문화적인 공간으로의 활용이다.
'B클래스’를 진행하게 된 것도 그런 맥락인가? 첫 번째 클래스는 홍두표 경기위원장의 룰 교육, 두 번째 클래스는 고덕호 프로의 레슨을 진행했던 것으로 안다. 강의 후에는 옥상에서 바비큐 파티도 했고.
- 좀 더 활성화하려고 한다. 콘텐츠도 좀 더 다양하게 진행할 것이다. 최대한 지원을 할 생각이다. 강의가 끝난 후 옥상에서의 파티도 좋다. 2번 정도 진행했는데 독특한 브리지스톤만의 문화로 자리잡았으면 좋겠다.
이제 환갑을 넘겼다. 얼마나 더 현역으로 활동할 것인가(웃음)?
- 은퇴한 친구도 많다. 한쪽에서는 일흔 넘어까지 일하라고도 한다. 지금 몇 가지가 충돌하고 있다. 나에게도 중요한 시점이다. 마무리 겸 또다른 시작을 할 전환점이라는 판단에서다. 이제는 솔직히 열정도 많이 식었다. 사실, 난 놀 것 다 놀았지만, 부담 없이는 아니었다. 언제나 회사라는 부담을 완전히 놓치는 못했다. 앞으로 여행을 다니고 싶은데, 티벳이나 남미 등 배낭 여행, 그것도 고생하고, 체험하고, 부딪히는 그런 여행을 원한다. 그러려더 늙으면 하지 못한다. 결정을 해야 할 시기인 것만은 분명하다.
최근에 사랑나눔자선대회를 끝냈다.
- 2005년 시작해 올해 9회를 맞았는데, 올해 처음으로 들인 비용보다 후원금을 더 많이 모았다. 첫 흑자였다. 첫해 9900만원을 들여 2400만원의 후원금을 모았지만, 올해는 후원금만 1억1984만원을 만들었다. 이 행사를 통해 ‘함께’라는 것과 ‘용기’가 어떤 결과를 주는지 알게됐다. 사랑나눔자선대회는 규모가 클 때는 300여명, 올해처럼 작을 때는 150여 명이 참여한다. 이들과 ‘함께’ 도네이션을 했다는 것에 큰 보람을 느낀다. 그리고 참가자들이 이제는 더 용기를 내고 있다. 용기라는 것이 나서서 싸우거나, 행동하는 것을 말하기도 하는데, 나는 ‘머뭇거리지 않는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도네이션을 할 때 처음에는 서로 눈치 보고 머뭇거렸다. 하지만 이제는 재미있게, 자신있게, 내기를 하듯이 서로 용기를 낸다. 30년동안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 제일 잘 한 일을 꼽으라면 ‘사랑 나눔’이라고 하겠다.
브리지스톤을 아껴주는 고객이나 마니아에게 한마디 한다면?
- ‘고맙습니다’라는 말 밖에 없다. 공유한 것에 대한 고마움이다. 나는 할리 데이비슨을 타는데 그들은 서로 ‘형제’라고 한다. 친 형제도 일주일에 한번 보기 힘든데 그들과는 일주일에 한번씩 만나 몇시간씩 같이 움직이고, 밥을 먹는다. 서로 나이 차이가 있기 때문에 서로 형, 동생으로 부른다. 그래서 할리 동호회는 활성화한다. 그게 공유다. 마니아는 그 이상으로 공유하는 것이 많다. 아까 ‘브리지스톤은 미드 아마추어나 프로들과 꾸준히 교류하는 것 같다’고 나에게 질문했었는데, 맞다. 나는 ‘인연’을 중시한다. ‘변치 않고 꾸준한 것’. 그런 점에서 오래 인연을 맺어준 브리지스톤의 마니아에게 그저 고마울 뿐이다.
아직 브리지스톤을 사용하지 않은 골퍼에게 한마디 한다면?
- 브리지스톤을 사용하면 ‘프라이드’를 느낄 것이라는 말을 하고 싶다. 할리 데이비슨을 90년대 말부터 탔는데, 할리 데이비슨은 그들만의 문화를 만들고, 할리를 타는 것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게 한다. 제품이나 브랜드에 대한 이미지가 좋다면 그걸 사게된다. 브리지스톤은 단조 아이언이 특화되어있고 드라이버와 우드류, 또 볼에 대한 성능이나 이미지도 좋다. 한번 사용해본다면 분명히 프라이드를 갖게 될 것이다.
*** 에필로그
인터뷰는 사무실 공간을 카페로 꾸민 ‘카페 드 맘보 Café De Mambo’에서 1시간 좀 넘게 했다. 물론 이민기 회장이 직접 볶고 갈아낸, 신선하고 맛있는 커피를 두 잔이나 얻어마셨다. 두툼한 커피잔을 미리 덥혀두고, 거름 종이를 깔고 핸드드립한, 여기다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가장 맞춤한 시간과 물 조절을 통해 추출한 커피였다. 과정 자체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접’받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 은퇴를 한 서희경도 이 ‘카페 드 맘보’ 단골 손님 중 한명이다. 서희경은 이곳에서 처음 커피를 받았을 때 아주 조금씩, 조금씩 나눠 마셨다고 했다. 이민기 회장이 그런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자 서희경은 다음과 같은 말을 돌려주었단다. “소중하게 타주셨잖아요!” 인터뷰 = 노수성 객원 에디터, 사진=석교상사 제공 cool240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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