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스포츠 100년](52)마라톤이야기⑬올림픽 신기록으로 우승한 손기정

정태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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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0-12-08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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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가 신발을 벗고 여유롭게 걸어가고 있다. 고개를 푹 숙이고 걸어가는 모습이 더 슬퍼보인다.
‘드디어 해냈다’…영웅 손기정, 올림픽 마라톤 신기록

결승점을 12㎞ 앞둔 30㎞ 지점. 처음부터 선두에 나서며 내달리던 자발라는 마침내 비극을 맞았다. 고통을 참으며 일그러진 얼굴로 독주를 한 자발라는 균형을 잃고 고꾸라지듯 앞으로 쓰러지고 말았던 것. 뒤로 쓰러지면 일어날 수 있지만 앞으로 쓰러지면 도저히 일어설 수 없는 것이 보통이다. 바로 앞으로 쓰러졌다는 것은 아예 의식을 잃었다는 뜻과도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이제 손기정의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따라 잡아야 할 목표는 없어져 버렸다. 오후 5시가 가까워지는 시각, 한여름의 뜨거운 태양이 조금씩 열기를 식혀 가고 있었지만 그와 함께 할 동반자는 그의 그림자뿐이었다.

이윽고 가파른 고개를 넘어서자 햇볕에 반짝이는 하벨 강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손기정의 얼굴에 흐르는 땀을 조금이나마 식혀 주었다. 좌우로 가득한 숲, 고요한 공원을 지나 40㎞ 지점에 이르자 비스마르크 고갯길에 접어들었다. 6분여에 이르는 고갯길을 올라서고 보니 이제는 내리막길만 남았고 저 멀리서 스타디움의 마라톤 탑이 손기정의 눈에 들어왔다. 스타디움을 보자 지금까지의 피로는 말끔히 사라지고 다리에 힘이 솟았다. 모든 고통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마라톤 선두, 스타디움 안은 이미 10만 관중들의 흥분된 목소리로 술렁거리고 있었다. 1만 명에 이르는 독일 나치스 청년단원들이 히틀러 총통의 입장과 영접에 나서고 마라톤 승리자의 입장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사토 코치가 마라톤 문에 나타나고 이어서 손기정이 유유히 나타났다. 이 순간 장내 아나운서가 ‘선두는 일본의 손기정’이라고 알렸다.

이 소리를 들으면서 손기정은 트랙 입구로 힘차게 뛰어 들었다. 열광하는 관중들의 기립박수와 함성이 스타디움을 뒤덮었다.

손기정은 마치 100m 단거리를 뛰는 스프린터처럼 결승점으로 뛰어 들었다. 2시간29분19초2, 1986년 근대올림픽이 부활된 이래 42.195㎞ 정규 마라톤 코스에서 아직 그 누구도 넘지 못한 2시간30분의 벽을 깬 세계최고기록이다.

손기정이 우승 테이프를 끊고도 2분이 지난 뒤 뒷덜미를 잡을 듯 따라붙는 2위 싸움이 더 볼만했다. 영국신사 하퍼가 2시간31분23초2로 2위로 골인했지만 마지막 순간에 모든 힘을 다 쏟아 부어 넣으며 따라 붙은 남승룡은 단 19초 차이로 3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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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승룡은 30㎞ 부터 무려 17명을 제치는 놀라운 지구력을 보이며 마지막에는 하퍼에 이어 3위로 골인했다.
남승룡의 분투는 마라톤 전문가들과 보도진을 놀라 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남승룡은 후반의 스퍼트로 30㎞까지 17명을 제친데 이어 35㎞ 지점에서는 7위였고 마지막에는 3위까지 올라섰으니 그의 지칠 줄 모르는 강인함과 막판의 놀라운 지구력은 가히 초인이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었다.

손기정은 이때 결승선에 들어와서 오히려 여유롭게 두 다리를 자기 손으로 부비고 마찰을 한 후 남승룡을 맞으러 유유히 걸어서 트랙 귀빈석 앞을 지나갔다. 이때 장내 아나운서는 손기정의 이런 유유자적한 행동에 말문이 막힐 정도였으며 관중들도 그 여유있음에 감탄, 또 감탄해 박수갈채가 끊이지 않았다.

우승후보라고 모두가 손꼽았던 자발라는 낙오자의 오명을 쓰고 말았고 손기정 남승룡과 함께 출전한 시오아쿠도 등외로 밀렸다. 잔디밭에 주저앉은 그에게 사토 코치가 달려와 손기정을 붙들고 눈물을 흘렸다.

6위까지 모두 골인하는 것을 기다려 1위 손기정, 2위 하퍼, 3위 남승룡은 차례로 단상에 올랐고 군악대 연주에 맞춰 국가 연주와 함께 국기가 게양되었다. 그 뒤 귀빈석으로 이동 히틀러 총통과 악수를 하고 축하 인사를 받았다.

세계가 지켜 본 마라톤 레이스는 이렇게 막이 내렸다. 손기정의 마라톤 우승은 가슴에 한을 품고 혼을 불살라 이룬 숭고한 승리였다. 개인적으로는 생애 최고의 환희였고 오매불망 우승 소식을 기다리던 조선인들에게는 민족 최고의 영광이었다.

[정태화 마니아타임즈 기자/cth082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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