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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체육 100년100인100장면] 16. 괴력과 괴성의 소년역사 강호동

2020-08-31 06:46

열흘 붉은 꽃 없다고 했다.

1989년 3월, 통산 10번 째 천하장사에 오른 이만기. 기술은 여전히 압권이었지만 힘에서 밀려 패배의 횟수가 조금씩 늘어나는 등 전 같지 않았다. 그래서 이만기는 은퇴시기를 모색하고 있었으나 생각지도 않았던 소년 천적 때문에 거의 강제은퇴의 길에 섰다.

[대한민국체육 100년100인100장면] 16. 괴력과 괴성의 소년역사 강호동


1989년 7월 부산 백두장사대회. 이만기는 또 한번의 우승을 위해 출전했다. 그러나 4강이 끝이었다. 4강전 상대는 혜성처럼 나타난 강호동. 2부리그에서 한바탕 회오리바람을 일으켰지만 역부족이라고 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젊디젊은 강호동은 겁이 없었다. 이만기를 만나면 꼬리부터 내리는 다른 선수들과는 달리 주눅 들지 않았다. 그리고 강호동은 첫 판에 이어 둘째 판까지 승리하며 요란한 세레머니를 했다. 이변이었지만 강호동은 이때부터 이만기의 천적으로 등장했다.

강호동은 와신상담의 세월을 보내고 9월 천하장사 모래판에 올라온 이만기를 또 내다꽂았다. 이만기는 스포트라이트가 비치지 않는 7~8위전에서 역도선수출신의 이민우를 잡고 겨우 7위를 했다. 이만기를 잡으며 괴성을 질렀던 강호동은 그러나 4강전에서 이봉걸에게 패해 결승진출은 놓쳤다.

강호동은 모래판의 악동이었다. 그에겐 선후배의 선이 없었다. 모래판에 오를 때면 의레 손바닥에 침을 뱉고는 손뼉을 치며 괴성을 토했다. 심판 판정에 까탈스럽게 달려들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샅바를 풀지 않고 승부를 펼치는 이 10대는 이기고 나면 두팔을 번쩍 치켜들며 다시 한번 괴성을 날리거나 심지어는 덤브링까지 하며 ‘점잖던 모래판’에 회오리 바람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의 악동기질이 여지없이 드러난 것은 천하 제1의 이만기를 상대하면서였다. 강호동은 마산상고 후배로 이만기의 집에서 기거하며 씨름을 배웠던 이를테면 거의 제자급이었다. 하지만 그가 어느 새 쑥쑥 자라 함께 모래판에 서는 선수가 되었고 첫 대결부터 샅바싸움을 끈질기게 하고 한판 이기면 모래를 뿌리며 난리를 치는 등 이만기의 심사를 건드리는 과도한 신경전을 폈다.

씨름판의 선배들이나 팬들 입장에서 보면 과도한 면이 없지 않았으나 강호동으로선 그 모든 것이 이기기 위한 전략이었다. 강호동에겐 그 어떤 선배도 모래판에선 똑같은 선수이고 경쟁자일 뿐이었다. 예의를 차리다 지는 것 보다는 ‘망나니’ 소리를 들어도 이기는 게 상수였다. 전장에선 ‘사람 좋으면 꼴찌’니 사실 강호동을 나무랄 순 없는 일이었다.

이만기는 잡았지만 천하장사와는 인연이 없었던 강호동은 1990년 3월 성남대회에서 마침내 천하장사 타이틀을 따내며 강호동 시대를 열었다.

강호동은 독한 겨울훈련을 하며 한껏 욕심을 부린 이만기를 또 4강전에서 누른 후 결승에서 유영대를 누르고 모래판의 새로운 강자로 우뚝 섰다. 최연소 천하장사였다. 이만기는 3~4위전에서 김칠규를 깨고 3위를 했다. 그의 천하장사 마지막 대회였다.

7월의 제19회 춘천 천하장사대회, 10월의 제20회 인천 천하장사대회에서도 우승, 3연속 천하장사에 오른 강호동을 한껏 부각시킨 대회는 제24회 천하장사 쟁탈전이었다. 결승전 상대가 강호동보다 무려 40kg이나 무거운 160kg의 박광덕이기 때문이었다.

이봉걸과의 길이 싸움에서 진 바 있었기에 무게의 싸움에서 질 수 있을 것이란 예상이었다.

둘의 싸움은 과연 난형난제였다. 한판씩 주고 받으며 2-2를 이룬 채 최후의 다섯째 판에서 겨우 승부가 결정 났다. 무게 3분의1의 격차를 뛰어넘으며 강호동이 승리했다.

강호동의 다섯 번째 천하장사 타이틀로 만 2년만에 이룬 천하장사 보유 역대 2위의 기록이었다. 1983년 출범, 1992년 3월까지 10년간 24번의 천하장사가 태어났으나 천하장사 타이틀을 한 번이라도 차지한 선수는 7명에 불과했다. 3李시대를 이끈 이만기가 10회로 1위가 다음이 5회의 강호동이었다.

이 기간 강호동은 백두급에서도 펄펄 날았다. 54회 대회부터 57회 대회까지 4연패를 하면서 7번이나 정상에 올랐다.

당분간 상대가 없어 길게 이어질 것 같았던 강호동 시대는 그러나 한순간에 끝났다. 정확하게 말하면 끝난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 끝내 버렸다. 1992년 4월 부산에서 열린 백두장사대회. 강호동은 예상밖의 성적을 기록했다. 8강전 첫 경기에서 패하면서 7위를 했다.

그리곤 다음 달인 1992년 5월 은퇴를 선언했다. 팀 이탈 등이 이어져 구구한 억측이 난무했지만 한번 은퇴를 발표해버린 강호동은 다시는 모래판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얼마 후 개그맨으로 브라운관에 얼굴을 내밀었다.

[이신재 마니아리포트 기자/20manc@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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