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스포츠 100년](26)애환 서린 성동원두

경성운동장-서울운동장-동대문운동장에서 현재는 흔적조차 없어

정태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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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0-05-21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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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훈련도감이 있던 훈련원 청사 모습. 우리나라에 근대스포츠가 도입되면서 이곳에서 많은 경기들이 열렸다.
일제의 의해 강제 해산된 훈련원을 경기장으로 활용
지금은 흔적도 남지 않고 사라져 버렸지만 스포츠를 좋아하는 우리 국민들이라면 흔히 성동원두라 불리는 동대문운동장은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바로 현재 동대문디자인플라자가 들어서 있는 자리에 있던 종합경기장으로 1988년 서울올림픽을 개최하면서 잠실운동장이 건설되기 전까지 우리나라 체육의 본산이나 다름없는 곳이 바로 성동원두이자 동대문운동장이었다.

이 성동원두인 이곳은 일제강점기에 일제에 의해 건설되어 경성운동장으로 불리다가 광복이 된 뒤에는 서울운동장-동대문운동장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체육인들은 흔히 성동원두라고 불렀다.

경성운동장은 원래 조선시대 군사들을 조련하던 훈련원의 일부였다. 훈련원이 위치했던 장소를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학자들은 대체로 북쪽은 청계천, 동쪽은 남산에서 장충동을 거쳐 이간수문으로 이어지는 물길, 서쪽은 마전교, 남쪽은 광희문에서 마전교로 이어지는 옛길로 둘러싸인 곳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곳은 전체적으로 평평하고 넓은 터여서 훈련장소로 유리한 지형이기 때문이었다. 이 훈련원은 1882년 임오군란 때 구식군대의 습격으로 신식군대를 조련하던 일본인 교관이 살해된 곳이기도 하며 이곳의 중요한 건물인 훈련원 청사는 1884년 갑진정변 때는 고종이 피난을 온 장소이기도 했다.

이런 역사적 현장인 훈련원은 1907년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고 훈련원공원으로 바뀌었다. 1910년 중앙기독교청년회 야구단이 훈련원 마당에서 경기를 한 사진이 있는 것을 감안하면 이때에는 경성에 부족한 운동장을 겸한 공원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다가 1921년 4월 처음으로 훈련원을 운동장으로 꾸민다는 기사가 눈에 띈다.

“(전략)꽃놀이에 시민에 제일 많이 사용하는 장소는 장충단공원인데 이 공원은 원래 장충단 시대부터 시민이 많이 사용하든 터이며 경성부에서도 시민이 원하는 공원으로 가장 적당하다고 하여 일찍이 공원 설비에 착수하였으나 예산 문제로 제대로 계획을 실행치 못하다가 이른 봄부터 새 길을 내고 다리를 놓았으며 꽃나무들을 심어 모든 설비는 거의 완성하여 공원 안을 한 바퀴 돌아도 15리(약 6㎞)가 되게 긴 거리를 뚫어 놓았으며 운동장이 두 군데요, 활쏘기가 한 군데요, 필요한 지점마다 변소를 설치하여 대개의 설비는 거의 되었다. (중략) 훈련원도 역시 경성의 공원으로 작년부터 나무도 심고 연못도 파서 시설공사에 착수하였으나 금년에는 임시비로 5,151원을 들여 장충단공원과 훈련원공원에 공사를 할 터인데 장충단공원은 수목이 많고 경치가 아름다워 산보하는 데에 적당하나 훈련원은 지면이 평탄하고 또 면적이 넓어서 시민의 운동장으로 장래에 크게 필요한 지점으로 (경성)부 당국에서도 역시 운동장으로 필요한 설비를 할 터이라는데 장차 훈련원에는 큰 연못도 파서 스케이트 경기장도 설비할 터이라 하더라.”(동아일보 1921년 4월 28일자)

이후 훈련원공원은 적극적인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고 공원 외곽에 가로등 설치, 훈련원공원과 장충단공원을 잇는 신작로 개설 등 소극적인 시설 보수 등에만 치중했는데 이는 바로 경성운동장 건설과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20년에 창립한 조선체육회도 각종 대회를 치를 때마다 각 학교들을 찾아다니며 경기장으로 빌리는 데 상당한 애로사항을 겪고 있는 터라 전용경기장의 설립을 나름대로 추진한 것으로 보이지만 일본인 단체인 조선체육협회가 있는 터에 일제가 협조를 제대로 하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반대로 조선체육협회는 1922년 10월 29일 제3회 전조선육상경기대회 겸 제6회 극동올림픽(1923년 5월) 조선예선전을 개최하면서 훈련원공원안에 경기장 설치해 경기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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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 있는 일본인들이 주동이 되어 만든 조선체육협회는 1925년 경성운동장이 개장되자 이를 기념해 제1회 조선신궁대회를 개최했다. 사진은 제1회 조선신궁대회 육상 경기 모습.
현대식 운동장, 경성운동장 등장
훈련원에 운동장 건립 계획은 예산 부족으로 계속 지연되다가 1924년 일본 히로히토(裕仁) 황태자의 가례 기념 운동장으로 만든다는 새로운 계획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조성당시 예산 문제와 조성 과정상의 문제점과 반발이 있었다.

동아일보는 1924년 10월 26일자 3면 기사에서 “우매한 경성부 당국, 경성운동 공사 지연은 야릇한 정실관계가 있는 듯?”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경성부에서 사회사업의 하나로 대정 12년, 13년 14년도의 계속 사업으로 15만 5천원이라는 많을 돈을 들여 훈련원에 만들려든 부립(府立) 그라운드는 경비상 관계로 12년도에 착수치 못하고 이제부터 설계에 착수하기로 되었는데 경성부에서 돈이 없다는 핑계로 계획하였든 모든 사업을 축소하며 혹은 중지하는 때에 한갓 그라운드에만 전력을 다하는데 대하여 그 내막을 알아보면 역시 정실(情實)에 관계되어 정대치 못한 사실이 잠재하였다는데 부청 당국자의 말에는 황태자 전하 어성혼(御成婚) 기념사업임으로 다른 것보다 먼저 한다고 하며 장소를 훈련원으로 택한 것은 교통의 편리와 임의로 넓은 마당이 있는 관계라고 하나 다 발림소리에 불과하니 훈련으로 말하면 경성도시 개조계획이 완성되지 못하여 그 부근은 장래 경성부의 중심이 될 가능성이 있는 곳인즉 위치상으로 보아 합당치 못하며 또 지금과 같이 재정이 궁합한 때에 한 평에 10원씩이나 주고 5천여 평을 더 사들일 필요가 어디에 있을까? 청량리 방면으로 위치를 정할 것 같으면 한 평에 20전이나 30전이면 얼마든지 살 수 있고 장래 도시 발전에 따라 매우 적당한 곳이라. 이에 불구하고 경성부에서 부득부득 훈련원을 취하는 까닭은 새로 사 들여야 할 5천여 평 땅은 고아(古我)라는 일본 사람이 사장인 조선산업무역주식회사의 소유토지로 한 평에 4~5원 밖에 안 되는 것을 비싼 값으로 조선상업은행에 저당에 들어간 것인데 그 토지를 상업은행에서 처리한다더라도 적당가액을 받아 낼 수 없으며 산업무역주식회사에서도 한푼이라도 더 받아 먹는 것이 이익임으로 상업은행 화전(화전) 두취를 간접으로 내세워 교섭에는 엉터리도 없는 매 평에 15원이라는 비싼 값을 불렀던 것을 10원에 우물쭈물하여 버릴 모양이라은데 아직 계약은 성립되지 않았으나 만일 성립된다하면 경성부에 대한 비난이 사뭇 높으리 라더라”

이 기사로 미루어 동아일보는 훈련원공원에 운동장을 조성하는 것에 대해 토지 매입에 엉터리없이 비싼 돈을 지불하는데 대해 정실에 의한 부정이라고 규정하고 반대를 했으나 경성운동장은 일본인 토목기사 오오모리(大森)의 설계에 따라 경성부 토목과장인 이와시로(岩城)의 공사지휘로 1925년 5월 24일 기공식을 갖고 공사를 진행했다.

오오모리는 2개월에 걸친 일본 국내 시찰 후 내린 결론과 외국 시설 연구, 전문가 의견 등을 감안해 설계에 반영했는데 당초 계획은 총면적 23,000평에 육상경기장 9,000평, 야구장 6,000평, 정구장·수영장·승마장에 각 1,000평, 녹지 5,000평이었다. 하지만 이와 달리 실제로는 육상장이 면적 8,500평, 야구장 5,500평, 정구장 1,000평 등이었다.

육상장은 길이 500m, 폭 10m의 트랙과 필드를 지닌 타원형으로 필드에는 축구장, 도약장, 투척장을 갖추었고 관람석은 낮은 계단식으로 당시 경성의 인구 25만 명을 기준으로 15,000명을 수용할 수 있도록 했다. 야구장은 홈에서 좌우펜스 거리는 108m, 관람석은 7,000명이었으며 정구장은 경기용 코트 2개 면에 연습용 코트 1개면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축구경기장과 함께 만든 육상경기용 트랙이 500m인데 이것은 경성운동장 설계 직전에 개최된 1924년 제8회 파리올림픽에 트랙이 500m였고 기타 세계적인 육상경기장들이 모두 500m라는 조선체육협회의 제안에 따른 것이었다.

경성운동장의 이름도 처음에는 훈련원경성운동장, 경성운동장, 경성부기념운동장 등 다양한 이름이 등장했는데 정식 명칭은 ‘동궁전하어성혼기념 경성운동장’이다. 경성운동장은 1925년 10월 15일에 개장 첫날에는 일반 시민들에게 무료로 개방했으며 10월 16일부터 17일까지 이틀 동안 조선체육협회가 제1회 조선신궁경기대회를 개최했다.

경성운동장이 개장할 당시 사용료는 경기용과 훈련용으로 구분하고 경기용 중에도 관람료를 받는 경기와 받지 않는 경기, 두 가지로 구분하였다.

먼저 관람료를 받는 경기는 ►경기장 전체 1일 간 100원 ►육상경기장 70원 ►야구장 50원 ►정구장 15원이며 관람료를 받지 않는 경기에는 ►경기장 전체 30원 ►육상경기장 20원 ►야구장 15원 ►정구장 5원이었다. 또 훈련용에는 ►야구장(3시간 이내) 3원 ►정구장(4시간 이내) 1원을 받았다. 이밖에 경기용이나 훈련용에 관계없이 입장하는 관객에게는 ►5살 이상 15살 미만에는 5전 ►15살 이상에는 10전을 징수하고 우대권은 입장료를 면제해 주었다.

조선체육회는 조선체육협회의 조선신궁대회에 맞서 제6회 전조선야구대회를 같은 날짜에 개최해 맞불을 놓았다. 그러다가 경성운동장을 사용한 것은 이해 10월 26일 미국 시카고대학팀과 전경성의 친선야구경기였으며 실제로 주최한 대회는 이듬해인 1926년 6월 17일부터 사흘 동안 열린 제6회 전조선정구대회였다. 경성운동장의 정식 준공일은 1926년 3월 31일이었다.

[정태화 마니아리포트 기자/cth082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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