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스포츠 100년](21)제1회 전국체육대회(하)

정태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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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0-05-04 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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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전조선야구대회 중학단 경기를 보도한 1920년 11월 6일자 매일신보 지면
현재 기록에 일부 오류 발견돼
1920년 7월 13일 창립한 조선체육회는 4개월 쯤 뒤인 11월 4일부터 6일까지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를 관중들의 열렬한 환호 속에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고 창립 후 첫 대회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그러나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에 대해 지금까지 발간된 각종 자료에서 일부 오류들이 발견됐다.

먼저 기록부분이다.

지금까지 발간된 대한체육회 50년사, 70년사, 90년사 뿐만 아니라 한국야구사<대한야구협회, 1999년 3월 20일 발행>에는 중학단은 배재고보와 경신고보, 실업단은 배재구락부와 경신구락부가 결승전을 벌여 배재가 모두 우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매일신보 보도에 따르면 중학단은 배재고보가 경신학교가 아닌 중앙학교를 2대1로 누르고 우승했으며 실업단은 배재구락부가 역시 경신구락부가 아닌 천도교청년회를 누르고 우승(전적 미상)한 것으로 나와 있다. 이와 관련 매일신보는 중학단 결승전에서 배재고보에 패한 중앙학교 학생들이 통곡을 했다는 결승전 내용을 상세하게 보도하고 있다.<1920년 11월 6일자 캡쳐 참조>

둘째는 수입 관련도 사뭇 다르다. 지금까지는 조선체육회는 창립하면서 기본 재산이 없어 식사비나 인쇄비 등이 모두 외상이었으며 야구대회 준비를 위해 조선체육회 간부들인 장두현 회장과 고원훈 이사장, 이승우 변호사 등이 100여 원씩 내고 사회 유지와 큰 회사, 상점으로부터 기부금을 받아 충당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또 입장료는 대부분 조선체육회 이사진과 학교관계자들이 ‘점잖지 못하다’는 이유로 무료로 할 것을 주장했으나 김병태 회계감독과 이중국 간사가 조선체육회의 유지 운영을 기부에만 의지할 수 없다고 맞서서 결국 대인 10전, 소인 5전으로 받기로 했는데 의외로 관중이 많아서 총 수입이 200원을 넘었고 이 덕분에 외상값도 모두 갚을 수 있었다고 기술했다.<대한체육회 50년사, 70년사. 90년사>

하지만 매일신보 기사에 입장권에 대해서는 “이번 대회에 특별히 입장료를 받기로 했다면서 입장료는 삼일동안 쓰는 것을 40전에 발행하는데 학생에 한해서는 그 반값인 20전씩에 할 것이고 본지에 있는 할인권을 찢어 가지고 오면 10씩을 더 할인해 30전으로 해 준다”고 보도했다.<매일신보 1920년 11월 4일>

또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를 위해 ►매일신보사 은제메달 11개 ►천도교대종사장 정광조 금 40원 ►천도교청년회 대표 김옥빈 금 30원 ►조선상업은행 금 30원 ►보성법률상업학교 금 20원 ►보성고등보통학교 금 20월 ►배재고등보통학교 금 20원 ►휘문고등보통학교 금 20원 ►중앙학교 금 20원 ►경신학교 금 20원 ►한성은행 금 30원 등 사회 각지로부터 후원이 들어왔다고 소개하고 있다.<매일신보 1920년 11월 8일>

매일신보의 보도로 미루어보면 조선체육회는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를 개최하면서 입장료 외에 250원 이상의 기금도 마련한 것으로 나타났다. 입장수입 200원까지 합하면 450원에 이른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금액이다. 하지만 당시 회계에 대한 명확한 기록이 없어 정확한 입장료 수입이나 이를 통해 조선체육회의 재정에 어느 정도 효과를 보았는지에 대해서는 살펴볼 수 없어 아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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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대회에서 시구하는 월남 이상재. 대부분 각종 자료에서는 이 사진이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에서 월남 이상재의 시구하는 모습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나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다른 대회 시구 모습으로 보인다.
또 의심스러운 부분은 시구에 관한 기록이다. 대한체육회 사사 등 많은 자료에는 월남 이상재 선생이 시구하는 모습의 사진을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 시구 모습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매일신보에는 시구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 특히 월남 이상재 선생의 옆에 서있는 선수의 유니폼에는 영어로 'KOR'이 선명하게 보인다. 바로 'KOREA'라고 쉽게 유추가 가능하다. 제1회 야구대회때 중학단이나 청년단에 이런 '고려' 혹은 '코리아'로 이름을 붙인 팀이 출전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 사진은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때 시구하는 모습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다만 중앙기독교청년회 총무를 맡았던 월남은 많은 대회에서 시구를 한 사진과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때 다른 야구대회 시구모습으로 추측이 될 뿐이다.

우리나라 최초 야구규칙 일부 찾아
우리나라 야구 도입은 1901년 서울(당시 황성)에 기독교를 전파하고 기독교청년회관을 짓기 위해 내한한 미국인 선교사인 질레트가 1904년에 처음으로 소개하고 1905년 봄 YMCA 회원들을 중심으로 야구단을 창단하면서부터라는 것이 정설이다. 그 뒤 도쿄유학생들이 방학기간을 이용해 야구단을 조직해 전국을 순회하면서 모국방문 순회 야구경기를 벌인 것이 전국으로 확산하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말로 된 야구경기 전문 규칙서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와중에 1920년 조선체육회가 창립되고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를 준비하면서 야구규칙서 필요성이 대두됐다. 이에 따라 이원용과 이중국이 1915년부터 오사카 아사히(大板朝日) 신문사 주최로 열린 전일본중등학교야구우승권대회(일명 고시엔대회)에서 사용했던 야구규칙을 우리말로 번역하고 이를 배재고보 교무주임인 이중화(이중국의 형)가 검열을 해 처음으로 야구규칙서가 탄생했다.<한국야구사 1999년 발행>

하지만 이때의 야구규칙서는 지금까지 흔적을 찾을 수 없었으나 ‘한국체육 100년’ 편찬과정에서 배재고보 운동부장 겸 조선체육회 심판원인 전의용(全義鎔)이 조선체육계 제3호(1925년 2월 25일 발행·대한민국 스포츠 100년 6에 소개)에 기고한 ‘최신야구규칙’ 일부를 발견했다. 전의용의 ‘최신야구규칙’이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 때 사용한 야구규칙 원본은 아니지만 최소한 이를 기초로 일부 우리 현실에 맞춰 개정한 야구규칙인 것으로 보인다. 전의용의 ‘최신야구규칙’은 일본 고시엔대회의 야구 규칙을 기본으로 하되 일부는 우리 현실에 맞도록 개정된 내용이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전의용은 조선체육계 제3호에 ‘최신야구규칙’을 기고하면서 “조선체육계 편집진으로부터 창간호부터 써 보내라는 통지를 받고도 겨우 3호에야 쓰기 시작해 앞으로 8~9회가 될 듯하다”며 “이 야구규칙이 우리나라 야구계에 참고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조선체육계가 제3호를 마지막으로 종간이 되는 바람에 전의용의 ‘최신야구규칙’은 단 1회에 그치고 말았다. 이에 ‘최신야구규칙’에는 야구경기장의 규정과 투수, 포수, 각 루 등의 라인을 긋는 방법과 볼, 배트의 규정 일부까지 모두 17조까지만 있을 뿐 실제 경기에 관련된 규칙은 빠져 있다.

이와 관련해 전의용과 함께 심판으로 활약한 박석윤은 1924년 5월 22일과 23일 시대일보에 ‘야구대회 인상’(野球大會 印象) 규칙 연구라는 두 편의 장문 기고문에서 야구 규칙은 모두 85조로 되어 있다고 밝혔다. 제1조부터 20조까지는 운동장 설비, 용구 규칙으로 일반 선수들은 연구할 필요가 적고 게임의 종류(6개조), 보결, 공수의 순서(2개조), 투수에 관한 규칙(8개조), 타격에 관한 규칙(14개조), 주루에 관한 규칙(5개조) 등 복잡하고 어려운 규칙은 21조부터 56조까지 담겨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정태화 마니아리포트 기자/cth082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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