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응답하라 1990]故 김동엽/최동원 감독의 '오락프로 출연'

프로야구에서 물러난 이후 '팬들과 가까이' 하기 위한 노력 돋보여

2014-02-03 22:59

▲현역시절의故최동원감독.은퇴이후팬들과더가까이가고자했던이였다.사진│롯데자이언츠
▲현역시절의故최동원감독.은퇴이후팬들과더가까이가고자했던이였다.사진│롯데자이언츠
[마니아리포트 김현희 기자]1990년대에는 프로스포츠에서 어설프게나마 ‘스포테인먼트’라는 개념이 조금씩 도입됐던 시기이기도 했다. 특히, LG 트윈스가 이광환 감독 부임 이후 투수 보직을 ‘선발-중간-마무리’로 고정을 시키면서 한국시리즈 우승을 일궈내자 다른 구단들도 이를 벤치마킹하여 전력을 강화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자율야구’를 모토로 많은 스타 플레이어들이 등장했다는 점은 한국 프로야구의 질적 발전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른바 ‘꽃미남 야구선수’가 등장하면서 야구장에 여성 팬들이 급증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때부터였다. 이에 일부 선수들은 시즌 직후 방송 매체에 자주 등장하여 팬들과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서기 위한 노력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러나 현역 선수들만 매스 미디어에 등장한 것은 아니었다. 프로야구 일선에서 물러난 이들도 간혹 오락 프로그램에 등장하여 야구팬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왕년의 스타’가 교양 프로그램이 아닌, 오락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것이 당시까지만 해도 상당히 드문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팬들과 더 가까이’, 故 김동엽/최동원 감독의 추억

그 중 이미 고인이 된 김동엽/최동원 감독은 1990년대 당시에 팬들에게 더 다가서기 위해 각종 오락 프로그램에 모습을 드러냈던 이들이었다. 먼저, 텔레비전 화면에 모습을 드러냈던 주인공은 김동엽 감독. 프로야구 감독 시절 ‘빨간 장갑의 마술사’로 정평이 났던 그는 해태 타이거즈(KIA 타이거즈 전신)의 원년 감독을 맡은 것을 시작으로 MBC 청룡(LG 트윈스 전신)에서 두 차례 감독을 역임한 바 있다. 특유의 스파르타식 훈련을 바탕으로 ‘별난 이야깃거리’를 많이 만들어냈던 김 감독은 실업 야구 롯데 사령탑 시절에는 부산에서 서울까지 선수들을 구보로 뛰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훈련 방식이 정작 프로에서는 빛을 발하지 못했다.

MBC 청룡을 끝으로 프로야구 감독직에서 물러난 그는 서울방송사(SBS)가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특히, 공중파로 프로야구가 중계됐던 1990년대에 SBS 텔레비전 채널에서 프로야구 해설을 하는 김동엽 감독의 모습을 찾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뿐만 아니라, 각종 시트콤과 오락 프로그램에도 출연하여 특유의 ‘끼’를 발산하기도 했다. 생전 그의 모습을 기억하는 박영진 상원고 감독은 “김 감독님은 삼겹살을 구워 드실 때도 정장 차림으로 홀로 식탁에 앉아 소주 한잔과 함께 ‘폼 나게’ 고기를 구워 잡수셨던 분이다.”라며 범상치 않은 그의 모습을 묘사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자신의 자서전 격인 ‘그래, 잘라라 잘라!’라는 제목의 저서를 집필했다.

하지만, 김 감독의 말년은 불우했다. SBS 야구 해설위원에서 물러난 이후 경제적 어려움을 겪음과 동시에 가정불화로 부인과 별거하던 중 1997년 4월, 서울 용산의 독신자 아파트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사망 전까지 누구도 그의 행적을 알 수 없을 만큼 그는 외로이 세상을 등졌다. 마지막 가기 전까지 그는 “내가 죽거든 관 속에 화투 한 모만 넣어 달라.”라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동원 전 한화 2군 감독은 사실 선수 커리어만 놓고 보았을 때 ‘오락 프로그램’에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인물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특유의 입담을 과시하며 각종 방송 프로그램에 모습을 드러냈고, 그럴 때마다 ‘선수 최동원’이 아닌 ‘인간 최동원’을 가까이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야구팬들도 뿌듯함을 느낄 법했다. 이에 대해 최 감독은 “방송을 통해서 제 얼굴이 보인다고 하면, ‘팬들 옆에 아직 제가 있습니다.’라는 의미에서 방송 출연을 한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이에 앞서 그는 후배들에게 조금 더 나은 환경에서 야구를 할 수 있게끔 해 주고자 잠시 ‘정계’에 도전하기도 했다. 1991년 시도의회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부산시 서구 광역의원에 출마했는데, 아쉽게도 결과는 낙선이었다. 이후 방송 출연을 접고 잠시 야인으로 돌아갔던 그는 2001년에서야 다시 그라운드로 돌아왔다. 한화 이글스 투수 코치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그는 이후 2군 감독직을 역임하면서 유망주들을 키워내기도 했다. 결국, 한화 이글스는 그에게 지도자 기회를 부여한 ‘처음이자 마지막 구단’이 된 셈이었다. 이후 그는 KBO 경기 감독관을 역임한 이후 건강상의 문제로 퇴임했고, 지난 2011년 7월 열린 ‘경남고 vs 군산상고’ 레전드 매치에서 더그아웃에 나타난 것을 끝으로 더 이상 그라운드에 나타나지 못했다. 이후 병원에서 투병 생활을 지속하다 같은 해 9월, 54세의 젊은 나이로 타계했다.

이렇게 두 이는 프로야구에서 그라운드를 떠난 이후에도 팬들과 더 가까이하기 위해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고, 이들의 뜻은 결국 사후에 더욱 빛을 발했다. 다만, 안타까운 점은 두 전직 감독 모두 나이 60을 넘기지 못한 채 너무 일찍 팬들 곁을 떠났다는 사실이다.

[eugenephil@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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