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0.2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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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기고] 마라토너 손기정 이야기③ (끝)

민족의 이름으로 달린 손기정

2025-10-27 08:10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결승선으로 들어오는 손기정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결승선으로 들어오는 손기정
“손 군이라면 틀림없이 세계를 제패할 수 있네. 저 일본 사람들의 콧대를 눌러 주게.”

선배 권태하가 남긴 말은 단순한 격려가 아니었다. 그것은 시대의 사명이었고, 고무신을 신고 달리던 소년의 집념이 마침내 도달해야 할 목표였다.

1933년, 손기정은 조선신궁경기 대회에서 처음으로 마라톤 풀코스에 데뷔했다. 당대 최강자였던 남승룡, 이민홍 등 기라성 같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그는 당당히 우승하며 화려한 ‘손기정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이듬해 경수 가도에서 열린 제2회 풀코스 마라톤 대회에서도 그는 또다시 우승했다. ‘양정’이라 새겨진 흰 러닝셔츠와 삭발한 머리에 수건을 질끈 두른 청년. 22세의 손기정은 이미 세계무대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무서운 마라토너로 성장해 있었다.

1935년 일본 명치신궁 경기 대회는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파견 예선을 겸한 경기였다. 손기정에게는 결코 놓칠 수 없는 무대였다. 4만여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레이스가 시작됐다. 안정된 폼, 완벽한 페이스, 흔들림 없는 집중력. 손기정은 자신이 세운 속도로 달렸다. 경기 중간, 어디선가 풍겨오는 역한 냄새가 호흡을 괴롭혔지만 그는 끝까지 버텼다. 그리고 마침내 일본의 심장부 신궁 경기장에 들어섰다. 2시간 26분 41초. 세계 신기록이었다. 이제 세계에는 ‘손기정보다 빠른 마라토너가 없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1936년 열린 올림픽 최종 선발전에서도 손기정은 남승룡과 함께 1·2위를 차지하며 베를린행 티켓을 거머쥐었다. 두 청년은 “조국의 이름을 숨기고, 조국의 영광을 위해 달린다”는 묵언의 약속을 품었다. 1936년 여름, 드디어 베를린. 스타디움에 모인 10만 관중 앞에서 손기정은 결승선을 통과했다. 기록은 2시간 29분 19초 2, 세계 신기록이었다. 하지만 시상대 위의 영광은 일본 국기로 가려졌다. 그가 고개를 숙인 이유였다.

“나는 조선인입니다.”


그의 한마디는 금메달보다 무거웠다. <동아일보>가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게재하면서, 손기정의 우승은 단순한 체육 성과를 넘어 ‘민족의 정신적 승리’로 남았다. 훗날 해방된 조국에서 손기정을 만난 김구 선생은 이 소식을 듣고 세 번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첫째는 망국의 백성이 세계 대회에서 우승했다는 소식에 감격하여 흘린 눈물, 둘째는 손기정이 학도병으로 끌려가 전사했다는 비보를 듣고 비통함에 흘린 눈물, 셋째는 죽은 줄만 알았던 그를 살아서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가움에 흘린 눈물이었다. 한 청년의 질주가 머나먼 타국의 독립투사에게 얼마나 큰 위로이자 희망이었는지 보여주는 일화다.

세계는 그의 승리를 축하했다. 그리스의 한 신문사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에게 고대 그리스 용사의 청동 투구를 증정하겠다고 발표했다. 기원전 600년경의 진귀한 유물이었다. 그러나 ‘아마추어 선수에게는 금품을 줄 수 없다’는 규정에 막혀, 투구는 손기정의 이름만 새겨진 채 베를린 박물관에 보관되어야 했다. 그는 승리했지만, 영광의 상징마저 온전히 가질 수 없었다.

그리스의 투구는 그로부터 50년이 흐른 1986년에야 비로소 원래 주인인 손기정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는 생전 사인을 할 때면 ‘손기정’ 이름 석 자 옆에 늘 한반도 지도를 작게 그려 넣었다. 억압 속에서도 자존을 지켰고, 승리의 영광 앞에서도 조국을 잊지 않았으며, 그 한을 제자들을 통해 기어이 풀어낸 불굴의 마라토너. 그의 정신은 단순한 승리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시련 속에서도 나아가야 할 길을 보여주는 영원한 이정표로 남아있다.

[특별 기고] 마라토너 손기정 이야기③ (끝)


[김원식 마라톤 해설가·전남 장성중 교사]

[김학수 마니아타임즈 기자 / kimbundang@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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