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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스포츠 100년](71)런던올림픽, 험난한 여정②사표쓰고 장도에 오른 첫 올림픽 선수단

2021-04-27 13:37

1948년 런던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단 결단식을 보도한 동아일보 지면[동아일보 1948년 6월20일 2면 캡쳐]
1948년 런던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단 결단식을 보도한 동아일보 지면[동아일보 1948년 6월20일 2면 캡쳐]
이상백의 막강한 입김으로 군정청 허락받아
IOC로부터 승인을 받은 조선체육회는 런던올림픽 출전을 위해 KOC를 정비했다. 1948년 2월 공석중인 조선체육회 회장과 KOC 위원장에 조선육상경기연맹 회장인 정환범을 보선했다. 정환범은 런던대학 제네바대학 케임브리지대학에서 경제학과 정치학을 전공하고 1940년 중국 상하이 호강대학, 성요한대학 등에서 교편을 잡다 광복과 함께 귀국해 신한공사 총재로 임명됐고 1947년 3월부터는 조선육상경기연맹을 이끌고 있었다.

정환범은 선수단 경비 마련, 선수 선발 등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어 부담스러워 회장 자리를 고사했다. 그러나 영국과 끈이 닿을 수 있는 인물은 런던에서 공부한 정환범 뿐이기에 체육인들의 반강제적인 추대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예상대로 선수 선발은 난항의 연속이었다. 조선체육회는 각 경기단체들은 자기 선수를 한 명이라도 더 내보내려고 다른 종목을 헐뜯는가 하면 같은 종목 안에서도 학연, 지연을 앞세운 자천타천의 추태가 이어졌다. 해외여행이 어려웠던 시기인데다 체육인에게는 올림픽 출전이 평생의 꿈이나 다름없기에 모두들 런던선수단에 포함되기를 안달했던 것이다.

줄이고 줄여 확정한 선수단은 7개 종목 67명이었다. 정부가 수립되기 전이라 미 군청정 확인이 필요했고 출전 비용도 협의를 해야했다. 그런데 명단을 받아든 군정청이 선수단 인원이 너무 많다며 10명을 줄여 줄 것을 요구했다. 간신히 20개가 넘는 경기단체의 요구를 어렵사리 67명으로 줄여놓은 체육회는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미 군정청 체육과장은 YMCA 출신인 김영구였다. 조선체육회와 미 군정청 사이에서 고심하던 그는 이상백이 “모두 다 보내줄 수 있는데….”라고 했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매달렸다. 이상백은 일제강점기에 일본농구협회 상무이사, 일본체육협회 전무이사를 지내고 두 차례나 일본 선수단 임원으로 올림픽에 참가한 전력 때문에 친일파로 몰려 체육계에서 소외되어 있었다. 그러나 상황이 워낙 다급하다보니 평소 그를 배척했던 체육계도 그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며칠 뒤 미 군정청이 조선체육회에 올림픽출전 선수단에 관한 결정을 발표한다고 알려왔지만 그 자리에 이상백이 나타나지 않자 발표를 보류했다. 당시 이상백은 체육계에서 물러나 명동에 ‘동방문화연구회’라는 이름의 사무실을 차려놓고 있었다. 체육회 관계자들이 동방문화연구소로 급히 사람을 보내 이상백을 회의장으로 부르자 그 때서야 미 군정청은 “주한미군 사령관 하지 중장의 지시로 올림픽 선수단 전원을 보내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이상백은 런던올림픽 선수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지 중장의 상관인 태평양주둔 연합군 사령관 맥아더 원수까지 움직였던 것이다. 맥아더와 브런디지 IOC 부위원장은 1928년부터 1930년까지 USOC 위원장과 부위원장으로 함께 재직한 가까운 사이였다. 이상백은 오랜 친구인 브런디지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브런디지는 맥아더에게 이 내용을 전달했다. 그리고 맥아더가 브런디지의 요청을 하지에게 지시함으로써 선수단 전원 파견으로 가닥이 잡힌 것이다.


미 군정청은 이상백에게 런던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단을 이끌도록 권유했지만 이상백은 거절했다. 선수단 임원 중에 자신을 배척했던 인사들이 다수 끼어있어 선수단을 장악하기 어렵다는 판단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사표 쓰고 장도에 오르다
런던올림픽 선수단이 확정된 뒤에도 잡음과 경기단체들의 불만은 그치지 않았다. 6월 14일 열린 조선체육회 임시평의원 총회에서는 선수 선발에 대한 성토와 함께 선수단 임원진 구성에 대한 문제점도 지적됐다. 임원은 미 군정청에서 일부를 바꾸도록 지시한 것이 불씨가 됐다.

이에 정환범 회장은 ‘올림픽 대표선수단 편성에 있어 시간적으로 불필요하게도 지연되어 사회적으로나 경기적으로 악영향이 있었으므로 그 책임을 자각함과 올림픽 파견에 관하여 미 군정과의 교섭에 있어서도 우리의 결의에 관한 자주실행이 불가능 상태에 있음에 이에 회장 부회장 이사 감사 등은 총사직키로 결의함.’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집행부 총사퇴 건은 여러가지 측면에서 임원을 교체할 수 도 없고 시간이 촉박한만큼 런던올림픽이 끝나고 선수단이 귀국한 후에 처리하는 선에서 봉합됐다.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참가한 런던올림픽 선수단 명단은 다음과 같다.
■본부임원 △단장=정환범 △부단장=신기준 △총감독=이병학 △총무=정상윤 김용구 △재무=심재홍 △의무=유한철 △트레이너=손기정 △조사=이영민 △방송=민재정 △수행=남승룡
■육상 △감독=김관우 이원용 △남자선수=서윤복 최윤칠 홍종오 함기용 김원권 인강환 심복석 안영한 이윤석 △여자선수=박봉식
■역도 △감독=이규현 △선수=박동욱 이규혁 남수일 최항기 김창희 나시윤 김성집 이영환
■복싱 △감독=노병렬 △선수=한수안 서병란 강인석
■레슬링 △감독 겸 선수=김극환 △선수=한상룡 김석영 황병관
■사이클 △감독=장일홍 △선수=권익현 황산웅
■축구 △감독=박정휘 △선수=차순종 홍덕영 박규정 박대종 이시동 민병대 이유형 김규환 최성곤 우정환 배종호 정남식 김용식 정국진 안종수 오경환
■남자농구 △감독=이성구 △선수=장이진 방원순 김정신 조득준 이상훈 이준영 강봉현 오수철 안병석

서울역에서 런던올림픽에 출전하는 우리 선수단을 환영하는 인파[동아일보 6월 22일자 지면 캡처]
서울역에서 런던올림픽에 출전하는 우리 선수단을 환영하는 인파[동아일보 6월 22일자 지면 캡처]
선수단이 런던올림픽 장도에 오른 것은 6월 21일이었다.

선수단은 출국에 앞서 제헌 국회를 방문하고 6월 18일에는 서울운동장에서 결단식을 겸한 시민 환송식을 가졌다. 스탠드에는 태극기를 손에 든 시민들이 가득했고 이승만 국회의장과 체육계, 미 군정청의 인사들도 대거 참석했다.

장도 전야에는 덕수궁에서 환송파티가 열렸다. 6월 21일 오전 서울역 광장은 선수단을 환송하는 인파로 가득했다. 선수단은 종로에 있는 YMCA에 모여 남대문을 거쳐 서울역까지 행진한 뒤 열차편으로 부산으로 떠났다. 차창 밖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잘 싸우고 돌아오라.”며 손을 흔들었다.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는 이도 있었다.

런던까지는 20일이 걸리는 머나먼 길이었다. 부산에서 하룻밤을 지낸 선수단은 이튿날 마지막 환송식에 참석한 뒤 배를 타고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떠났다. 하카다 항에 도착한 선수단은 다시 열차로 갈아타고 요코하마로 향했는데 열차가 멎는 곳마다 재일동포들이 마중을 나오는 등 선수단을 격려하는 분위기가 일본에서도 뜨겁기는 마찬가지였다.

도쿄에 체류하는 재일동포들은 푼푼이 모은 성금과 함께 유니폼, 양말, 넥타이를 선수단에게 전달했다. 오사카와 교토 거주 재일동포들도 성금과 쌀, 수건 등을 기탁했다.

[정태화 마니아타임즈 기자/cth082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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