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스포츠 100년](56)이길용 기자의 일장기 말소 의거②1932년 LA올림픽 '소의거'에 이어 1936년 베를린올림픽 일장기 말소 '대의거'

정태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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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0-12-26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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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 마라톤 6위에 입상한 김은배 선수가 가슴에 일장기대신 양정고보의 상징인 Y자가 적힌 셔츠를 입고 있다. [동아일보 1932년 8월 9일자 캡쳐]
1932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부터 시작된 일장기 말소
‘소의거’
1932년 여름, 조선은 제10회 로스앤젤레스올림픽으로 들떠 있었다. 단 3명에 불과했지만 7월 30일부터 8월 14일까지 열린 이 올림픽에 우리 선수들이 처음으로 세계 스포츠 무대에 출전했기 때문이었다. 마라톤에 김은배와 권태하, 그리고 권투의 황을수였다. 이 올림픽에서 황을수는 1회전에서 독일 선수를 만나 탈락했지만 마라톤에서 김은배가 6위, 권태하가 9위에 오르면서 조선인의 기개를 뽐냈다.

이때 김은배가 6위로 들어오는 동아일보(8월9일자) 보도사진을 보면 김은배의 가슴에 있어야 할 일장기는 감쪽같이 없어지고 양정고보를 상징하는 ‘Y’가 붙어 있다. 바로 일장기 대신 이 자리에 ‘Y’를 그려 넣은 것으로 동아일보의 첫 일장기 말소 의거였다.

이에 대해 일본의 저술가인 가마다 다다요시(鎌田忠良)는 ‘일장기와 마라톤, 베를린 올림픽의 손기정’이란 자신의 저서에서 로스앤젤레스올림픽에서 지워진 일장기에 대해 서술한 부분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1932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대회에서 김은배 선수가 마라톤 경기에 출전하여 6위로 입상할 때에도 눈에 거슬리는 히노마루(일장기)는 기술적으로 말소해 놓았다. 제10회 올림픽대회 국내 보도에서 동아일보의 경우 은연중에 일장기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과연 당시의 동아일보를 보면 확실히 이 신문에 게재된 김은배 선수의 각종 사진에 문제의 붉은 동그라미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대신에 사진은 한결같이 그의 모교인 양정고등보통학교의 머리 글자인 ‘Y’ 마크로 통일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권태하 선수의 경우에도 역시 붉은 동그라미가 들어 있는 사진은 나오지 않으며 다만 마크도 없는 검은 셔츠 스타일로 되어 있다.

로스앤젤레스올림픽 때부터 이미 무엇인가 의도적인 수정이 동아일보 기자들 사이에서 있어 왔다고 알아챌 만하다. 그런데도 조선총독부는 당시 아무런 문책도 없이 지나쳤다.

일본의 모든 신문은 츠다 세이이치로를 포함해서 마라톤 출전 선수 중 그들의 사진을 한 장도 게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동아일보의 30대 기자 이길용과 이상범의 비상한 고안으로 김은배 입상 때 이미 사진을 의식적인 수정이라든가 바꿔치기가 이 신문사에서 은밀히 이뤄졌다고 보인다.

이러한 쾌거가 4년 뒤인 베를린 올림픽 대회 마라톤 세계 제패에서 매우 자연스럽게 진행되어 나갈 수 있게 된다.”
<일장기 말소의거 기자 이길용에서, 한국체육기자연맹 저 1993년 12월 15일 발행>

공식적으로 이 내용에 대해서는 동아일보사사(東亞日報社史)에서도 언급을 하지 않고 있으며 조사부 미술 담당 청전 이상범 화백의 조력을 받았는지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길용 기자 본인도 여기에 대해서는 일체 입을 열지 않았다. 여하튼 이길용 기자의 로스앤젤레스올림픽 일장기 말소는 4년 뒤 베를린 올림픽 일장기 말소 대의거(大義擧)의 초석을 놓은 소의거(小義擧)라 불러도 지나침이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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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앙일보는 8월 13일자 손기정 선수의 우승 사진에서 일장기를 삭제한 사진을 게재했다. [사진 조선중앙일보 캡쳐]
손기정의 가슴에 붙은 일장기 말소 ‘대의거’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하고 난 나흘 뒤인 1936년 8월 13일, 동아일보와 중앙조선일보에는 손기정과 남승룡의 시상식 사진이 실렸다. 조선중앙일보는 4면 하단에 ‘머리에 빛나는 월계관, 손에 굳게 잡힌 견모목’이란 제목으로 월계관을 쓴 손기정과 부동자세로 서 있는 남승룡의 사진을 게재했다.

동아일보는 7면에 ‘지상 천하에 넘치는 제패의 의기’라는 제목으로 전면을 화보로 할애했다. 한가운데에는 조선중앙일보에 개재된 사진과 같이 월계관을 쓰고 시상대에 서있는 손기정과 남승룡과 제1회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인 그리스 루이스가 성화최종주자로 입장하는 모습, 손기정이 1위로 테이프를 끊는 장면, 히틀러 총통이 입장, 선수단 입장식 광경을 실려 있다.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가 게재한 사진은 똑 같은 사진이면서도 자세히 살펴보면 다르다. 조선중앙일보에는 월계관을 쓴 손기정과 남승룡의 가슴에 붙어 있어야 할 일장기가 보이지 않았다. 양정고보 출신 유해붕 기자의 한발 빠른 의거였다. 하지만 조선총독부는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때 동아일보 대한 것처럼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그로부터 12일, 그리고 손기정이 베를린 마라톤에서 우승을 하고 2주일이 지난 1936년 8월 25일, 이길용이 주도한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 대의거가 일어났다.


바로 전날인 24일 이길용 기자는 일본 오사카에서 자택으로 온 소포를 받았다. 오사카 아사히신문사에서 격주로 발행하는 ‘아사히 스포츠’였다. 이 잡지에는 베를린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일본 선수 9명 사진이 실렸다. 마라톤 표창식 사진은 동아일보가 8월 13일에 게재한 사진과 같은 것이지만 아주 선명했다. 이 사진을 오려서 다음날 동아일보로 출근한 이길용은 “조금 옅게 잘 보이지 않게 해서 손 선수의 가슴을 보도하겠다”라고 빙허 현진건 사회부장에게 보고한 뒤 청전 이상범 화백과 마주 앉았다.

이길용 기자가 “사진에서 붉은 동그라미 부분을 엷게 할 수 있겠나”고 묻자 청전은 “엷게 잘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어려우니 차라리 깨끗하게 지워 버리는 편이 간단하다”라고 말했다. 이심전심(以心傳心),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없었다.

이길용 기자와 이상범 화백은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있는 붉은 동그라미를 지워 버리고 났을 때의 여파를 결코 몰랐을 리가 없다. 서슬 시퍼런 일제의 감시 하에서 일장기를 지운다는 것은 바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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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장기가 삭제된 채 발행된 동아일보 1936년 8월 25일자 석간 2면[사진 동아일보 캡쳐]
그리고 8월 25일 동아일보 석간 2면에는 ‘영예의 우리 손군’이란 제목으로 사진 2장이 실렸다. 위에는 머리엔 월계관 두 손엔 감람수(橄欖樹)의 화분! 마라손 우승자 “우리 용사 손기정군”이란 설명을 붙였고 아래에는 마라손 정문을 나서 용약출발(勇躍出發)하는 손 선수(지난 9일 세계 제패한 그 날)라고 설명을 달았다.

바로 위의 이 사진에서 손기정의 가슴에 붙어 있는 일장기를 지워 버린 것이다.

그리고 같은 날짜 조간에는 일장기가 지워진 손기정의 사진은 게재하지 않고 대신 8면에 올림픽 스타디움에 들어오는 손기정의 사진과 마라톤을 마치고 입상한 세 선수 사진을 실었다. 손기정과 남승룡의 가슴에는 일장기가 그대로 붙어 있는 사진이었다.

이 사진이 보도되자 일제는 곧바로 동아일보를 압수수색하고 이길용 기자를 비롯해 관련자들을 연행했다. 일제는 ‘일장기 말소’를 동아일보 사장인 고하 송진우나 사주인 인촌 김성수까지 연루시키기 위해 이길용 기자를 압박하고 무자비한 고문을 자행했다.

그러나 이길용 기자는 끝까지 “히노마루(일장기)를 아주 지워 버리려고 한 것이 아니고 그 농도가 너무 짙기 때문에 조금 흐리게 하려고 한 것이 지나쳐 그렇게 되었다”고 끝까지 주장했다.

당시 동아일보의 자매지였던 신가정에서는 일장기가 있는 손기정 선수의 사진 대신에 손기정의 발 부분을 게재하고 나서 “이것이 베를린 마라톤 우승자, 위대한 우리들의 아들 손기정 선수의 발…”이라고 해 일제의 조사를 받았다. 이때 담당 기자였던 수주 변영로는 “그야 마라톤에선 다리와 발이 제일이니까요…”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하여튼 이길용 기자와 이상범 화백이 주도한 일장기 말소 의거로 8월 26일 부임한 조선총독부 미나미 총독이 8월 29일부터 동아일보에 무기한 정간처분을 내렸다. 동아일보로서는 4번째 정간이었다. 뒤이어 신동아 9월호 역시 일장기가 말소된 사진을 게재, 손기정 선수의 발 사진을 게재한 신가정과 함께 9월호를 마지막으로 강제 폐간되고 말았다.

일장기 말소 의거의 직접 책임자로 지목된 이길용 기자는 다시는 기자생활을 하지 않겠다는 시말서를 쓰고 40일 만에 풀려났다. 이 동안 가족에게만 단 한 차례 면회가 허용되었을 뿐이고 수시로 옷 차입만 가능했는데 얼마나 모진 고문을 받았는지 나오는 옷을 걸레나 다름없었고 피에 젖어 있었다.

이 의거로 동아일보에서는 송진우 사장과 장덕수 부사장, 김준연 주필, 설의식 편집국장, 양원모 영업국장, 현진건 사회부장, 이여성 조사부장, 박찬희 지방부장, 최승만 잡지부장, 신낙균 사진과장, 이길용 체육주임, 이상범 화백 등 14명이 신문사를 떠났다.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가 큰 문제가 되자 조선중앙일보도 덩달아 정간을 당했다. 일제는 조선중앙일보에 여운형 사장의 해임을 요구했고 운영난까지 겹친 조선중앙일보는 나중에 정간이 풀렸으나 제때 복간을 하지 못해 결국 폐간의 운명을 맞고 말았다.

그리고 동아일보는 무기 정간을 당한 지 279일이 지난 1937년 6월 2일에 정간이 풀려 6월 3일 석간부터 다시 신문을 발행했다.

[정태화 마니아타임즈 기자/cth082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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