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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박사 기자의 스포츠용어 산책 128] 왜 ‘홈런(Homerun)’이라는 말에 '런'이 들어갔을까

2020-09-03 07:52

미국 메이저리그 탬파베이 레이스 최지만이 홈런포를 터뜨리고 동료 환영을 받으며 홈을 밟고 있다.
미국 메이저리그 탬파베이 레이스 최지만이 홈런포를 터뜨리고 동료 환영을 받으며 홈을 밟고 있다.
‘홈런(Homerun)’은 야구의 꽃이다. 홈런이 터지면 야구장은 축제마당으로 바뀐다. 지금은 코로나19의 대유행으로 무관중으로 치러져 일부 치어리어와 함께 장내 방송 팡파르가 환호를 대신하지만 정상적으로 관중이 들어찰 때는 홈런이 터지면 요란한 함성이 울려 퍼진다. 선수들은 코로나19 이전과 같이 홈런을 치고 들어오는 타자를 손뼉을 치며 축하해준다. 어떠한 홈런이든 치는 선수들은 기분이 좋고, 관중들은 그 짜릿한 순간을 황홀경으로 기억한다.

홈런이라는 말은 원래 야구 발상지 미국에서 1800년대 중반에 처음 등장했다고 미국 야구백과사전들은 설명하고 있다. 홈런은 모든 베이스를 성공적으로 도는 타자의 기본 행동에서 나온 말이다. 홈런 초창기에는 외야 펜스가 없어 타자들이 홈런을 만들기 위해선 빨리 달리는게 아주 필요했다. 외야수를 넘기는 안타를 치고 1,2,3루를 돌아 재빨리 홈플레이트를 밟아야 홈런이 됐다. 지금은 홈런이 펜스를 넘어 치면 됐지만 당시만해도 펜스가 없었으니 빨리 뛰는 것이 중요했던 것이다. 야구볼도 손으로 직접 만든 부드러운 재질로 이루어져 지금보다는 더 멀리 나가지 않던 시절이었다. 득점이 이루어지는 장소인 홈베이스와 달린다는 의미인 런을 결합해 홈런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졌다는 해석이다. 당시는 요즘 말로 '러닝(Running) 홈런이 대부분이었고 장쾌한 홈런은 흔하지 않았다. 단타나 2루타를 치고 나간 주자들이 도루를 하거나 후속타가 이어져 득점을 올렸다. 홈으로 들어와 득점을 올리기 위해선 런이 필요했던 이유였다.

경기가 더욱 조직화되고 프로가 되면서 홈런 부문 선두주자들이 시즌 10개 이하로 홈런 부분을 이끌기도 했다. 1871년 첫 미국야구 프로 시즌에는 3명의 선수가 홈런 4개로 전국프로야구협회(NBA)에서 공동 선두에 올랐다는 기록이 있다. 홈런이라는 말은 190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됐다. 1911년 보스턴 레드삭스의 홈구장 펜웨이파크가 개장하며 야구장이 펜스를 설치하고 규격화되며 홈런이 양산되기 시작했다. 1920년대 전설의 홈런 타자 베이브 루스가 당시는 상상할 수 없는 홈런을 양산하자 홈런에 대한 관심이 증폭됐다. 베이브 루스 이후 홈런은 타자의 위력을 평가하는 데 훌륭한 기준이 됐다. 투수들은 홈런을 맞지 않기 위해 절치부심하고 타자들은 홈런을 만들어내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홈런에 열광한 관중들은 1990년대 마크 맥과이어와 배리 본즈의 기록적인 홈런 볼을 수집하는 경쟁을 보이기도 했다. 이 볼들이 수십만달러의 고가로 거래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기 때문이었다.

일제 강점기 시절 야구가 본격적으로 보급된 우리나라에서 홈런은 당초 글로는 '본루타(本壘打)'라고 쓰고, '호므랑'이라고 말했다. 본루타라는 말은 타자가 1,2,3루를 돌아 안전하게 본루, 즉 홈베이스를 밟는 안타라는 의미였다. 호므랑은 영어 발음을 일본어식으로 한 것이었다. 1920년대 베이브 루스도 인정했다는 조선 최고의 타자 이영민을 소설화한 소설가 백상국의 소설 '호므랑 이영민-스스로 전설이 된 남자'는 당시의 분위기를 잘 보여주었다. 본루타와 호므랑이라는 말은 1970년대까지 한국 야구용어로 많이 사용되기도 했는데 1980년대 프로야구 출범이후 홈런이라는 말이 정착됐다.

[김학수 마니아리포트 편집국장 kimbundang@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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